수요일 오후 3시 17분, 회의실을 나선 발걸음이 유독 무거웠다. 복도의 형광등이 내리쬐는 빛 아래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흐릿한 윤곽만 남아있었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켰지만, 화면의 푸른빛이 오히려 눈을 시리게 했다. 커피잔에 남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키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바로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했다. 무심코 화면을 확인하니 브런치 알림 하나가 떠 있었다. "작가님 덕분에 하루를 버텼어요." 짧은 댓글이었지만,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손가락이 저절로 화면을 확대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급하게 올렸던 짧은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던진 돌멩이가 누군가의 호수에 잔물결을 일으킨 것 같았다. 의자에 기댄 채 한참을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회의실에서 받았던 날카로운 지적들, 동료들의 무관심한 시선들이 순간 희미해졌다. 누군가의 하루가 내 글 한 줄로 지탱되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나의 하루를 구원하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 반사된 형광등 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쓴 글의 무게를 실감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나의 언어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부표가 되었다니.
"작가님이 써줘서 다행이에요." 댓글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일상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 안에서는 미세한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느꼈던 모든 외로움과 의구심이 이 한 문장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깊은 우물 속에서 혼자 외치던 목소리가 마침내 누군가의 귀에 닿은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이런 미세한 울림들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던진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고, 그 누군가의 응답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이 신비로운 순환을. 말은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영혼과 영혼을 잇는 보이지 않는 다리였다.
"이 문장, 캡처해서 계속 보고 있어요." 두 달 전 어느 독자가 남긴 댓글이었다. 처음 그 말을 봤을 때, 나는 노트북 앞에서 얼어붙었다.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고, 가슴속에서는 이상한 진동이 일어났다. 내가 쓴 평범한 문장 하나를 누군가 화면에 담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봄은 늦게 오는 사람에게도 공평하게 찾아온다." 솔직히 나조차도 잊고 있던 문장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문장이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며, 나는 언어가 가진 불가사의한 생명력을 느꼈다.
밤 11시, 원고 마감을 앞두고 막막함에 빠져 있을 때였다. 빈 문서 창은 끝없이 펼쳐진 설원처럼 메말라 보였고, 커서만이 무심하게 깜빡였다. 바로 그때 문득 과거에 받았던 또 다른 댓글이 떠올랐다. "그 글, 제가 힘들 때마다 꺼내 읽어요. 부적처럼요." 그 말을 떠올리자 신기하게도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글을 부적처럼 품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온기가 얼어붙은 내 안의 언어들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타인의 말 한마디는 때로 가장 춥고 어두운 밤을 견디게 하는 은은한 불씨가 된다. 창밖으로는 늦가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온화한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부드럽게 깨뜨렸다. 한 문장, 두 문장, 천천히 글이 써져 내려갔다. 얼어붙은 강물이 봄볕에 녹아 다시 흐르기 시작하듯, 내 안의 이야기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글쓰기란 결국 이런 것이구나. 홀로 하는 작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독자들과 함께하는 대화였다. 내가 받은 위로를 다시 글로 전하고, 그 글이 또 누군가를 위로하는 끝없는 순환.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원고를 마무리했다.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은 피곤했지만, 입가에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이 머물고 있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준 힘으로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밤이었다.
가을비가 창문을 두드리던 어느 목요일 저녁이었다. 퇴근 후 들른 동네 카페는 따뜻한 조명과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오늘 올릴 글을 검토하고 있었다. 마침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작가님 글 덕분에 감정이 정리됐어요. 뭉클하면서도 시원해요." 커피잔을 들던 손이 잠시 멈췄다. 화면 속 그 짧은 문장이 거울처럼 내 마음을 비추고 있었다.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정리하려 했던 것도 바로 그런 감정들이었으니까.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같던 마음이 글로 풀어지는 순간의 해방감을. 글쓰기는 혼자만의 치유가 아니라, 함께하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때로는 며칠을 고민해서 다듬은 문장보다, 순간의 진심을 담아 쓴 한 줄이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계산된 연설보다 떨리는 목소리의 진짜 고백이 더 가슴을 울리듯이. 나는 독자의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저도 쓰면서 정리가 됐어요. 함께여서 고맙습니다." 그 찰나, 카페의 따뜻한 공기가 더욱 포근하게 감싸왔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에스프레소 머신의 익숙한 작동음도 모두 이 세상이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신호 같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일기장을 펼쳤다. 오늘 하루 받은 말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한 가지 구체적인 실천법을 떠올렸다. "마음을 흔든 문장을 만났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적어두세요." 핸드폰 메모장이든, 수첩이든, 어디든 좋다. 그 문장들을 모아두면 언젠가 가장 막막한 날에 당신을 지켜줄 든든한 버팀목이 될 테니까. 삶의 가장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하는 것은 거창한 격언이 아니라, 누군가 진심으로 건넨 평범한 한마디다. 나 역시 그런 말들을 모아 여기까지 왔다. 독자들이 남긴 댓글, 우연히 들은 라디오의 한 구절, 책 속에서 발견한 위로의 문장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평범해 보이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 우리는 종종 과소평가한다.
지난봄, 오랜만에 글쓰기 모임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한 참가자가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음 글도 기다릴게요. 꼭이요." 그 찰나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누군가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묵직한 책임이자 가장 따뜻한 격려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계속 그 말을 곱씹었다. 플랫폼을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별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설령 한 명의 독자라도, 그 기다림이 있는 한 나는 계속 쓸 것이라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안다. 글쓰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그것은 명예나 인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연결의 순간들 때문이었다. 내가 쓴 글에 누군가 위로받고, 그 사람이 전한 감사에 내가 다시 힘을 얻고, 그 힘으로 또 다른 글을 쓰는 이 아름다운 순환. 우리는 모두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문장이 되어 살아간다. 때로는 쉼표가 되어 누군가의 숨을 고르게 하고, 때로는 마침표가 되어 아픈 과거를 매듭짓게 하고, 때로는 물음표가 되어 새로운 시작을 열어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고 있다. 하얀 눈송이들이 가로등 불빛 속에서 춤을 추듯 내려앉는다. 노트북을 닫고 창가에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본다. 저 눈송이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이야기인 것처럼, 우리가 주고받는 말들도 이렇게 조용히 세상을 덮어간다. 차갑고 메마른 일상 위에 따뜻한 담요처럼. 오늘 당신이 받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있다면, 이제 당신이 그 온기를 전할 차례다. 거창할 필요 없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당신의 글이 힘이 됐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같은 진심 어린 한마디면 충분하다. 기적은 드라마틱한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말 한마디가 만드는 미세한 울림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살리는 문장이 되어, 오늘도 함께 살아간다. 때로는 화려한 서사시보다 짧은 시 한 편이, 긴 설명보다 진심 어린 한마디가 더 깊은 여운을 남기듯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작은 말들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 되어준다.
이런 말 한 줄에 며칠을 버틴다
1. 다음 글도 기다릴게요
2. 작가님이 글을 써줘서 다행이에요
3. 이 문장, 캡처해서 계속 보고 있어요
4. 그 글, 제가 힘들 때마다 꺼내 읽어요
5. 작가님 글 덕분에 감정이 정리됐어요
말 한 줄이 한 사람을 버티게 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 말로 다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