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창밖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고 방 안에서는 노트북 화면만이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고, 잠시 망설임 끝에 '게시'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으로 스며든 글자들이 사라지고, 이어진 것은 익숙한 침묵뿐.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살짝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두터운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지만, 아무도 그 흔적을 보지 않는 것 같은 고요함.
"이렇게 계속 써도 의미가 있을까?"
질문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렸다. 화면 속 잔잔한 물결 위에 던진 돌멩이처럼, 그 파문은 마음 깊숙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손은 다시 키보드 위에 올라갔다. 나는 언제부턴가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시작된 글쓰기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은, 그 자체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를 새기는 일은, 내 안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마침내 자신의 형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으니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이 흐릿했다.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작가.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나는 종종 길을 잃곤 했다. 그러나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문장을 써 내려가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기분이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문장이라는 그릇에 담겨 조용히 피어났다. 반응이 없어도, 읽는 이가 없어도 괜찮았다.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과의 대화가 충분히 가치 있었으니까.
어두운 방 안에서 오직 나만이 보는 화면 속 글자들, 그것은 마치 밤하늘에 혼자 떠 있는 별처럼 고독했지만 동시에 선명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 별처럼, 나는 그렇게 조용히 글을 남겨갔다.
처음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릴 때, 나는 작은 별 하나였다. 무한한 우주 속에 점 하나 찍힌 듯한 존재감. 빛은 있었지만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희미한 존재였다. 조회수는 완강하게 0을 유지했고, 댓글창은 텅 비어 메아리만 돌아왔다. 글을 올리고 며칠을 기다려도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화면을 새로고침 할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0.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가끔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계속 쓰고 있지?' 뜨끔한 자기 의심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리창에 대고 소리쳐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나의 목소리는 공허한 디지털 공간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텅 빈 반응 속에서도 계속 글을 쓰는 일은,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을 위한, 타인의 인정 없이도 지속되는 사랑.
하지만 이상하게도 멈출 수 없었다. 주말마다, 퇴근 후 고요한 시간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와 대화하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에서 작은 위로가 피어났다. 그 고요한 반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내 안의 목소리를, 가장 진실된 방식으로 듣고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누군가의 반응 없이도 의미를 찾는 법을 배웠던 시간들.
그러던 어느 월요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중 핸드폰에 이메일 알림이 떴다. 무심코 열어본 메일함에서 낯선 이름이 반짝였다.
"선생님의 글을 저희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월간에세이 청탁 드립니다."
잠시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화면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읽었다. 처음엔 스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발신자 메일 주소와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제 문예지에서 보낸 진짜 원고청탁이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내 눈앞에서 무지개처럼 빛났다. 누군가가, 정말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오래도록 혼자였다고 생각했던 우주에서 마침내 도착한 첫 번째 응답이었다.
그날의 출근길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바람이 불어도 발걸음은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메일을 세 번씩 다시 확인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글들이 누군가의 눈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첫 번째 청탁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텅 빈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매일 밤 노트북을 열고, 오늘 느낀 감정들을 헤아리고, 그것을 글자로 옮기는 일상은 변함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설레는 마음 한 조각. 그러나 여전히 브런치에 올린 글들은 조용했고, 대부분의 밤은 고요했다. 한 줌의 인정이 내게 가져다준 것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작은 양초 하나를 밝히는 정도의 빛이었다.
모래시계 속 모래알들이 천천히 흘러내리듯, 매일의 시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자리에서 글을 쓰고 고치고 또 고쳤다. 때로는 문장 하나를 위해 한 시간을 소비하기도 했다. 완벽한 단어를 찾아 헤매는 밤이면,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이 내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렇게 이어진 시간 속에서, 무언가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 봄이 오기 전 땅속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움직임.
글을 쓰는 순간의 설렘이 조금씩 깊어졌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한 줌의 확신이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다. 어쩌면, 씨앗 하나가 심어진 거였다. 그것은 인정에서 오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단단함이었다.
두 번째 청탁이 도착했다. 화면에 떠오른 청탁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처음과는 달랐다. 놀라움보다는 조용한 감사함이, 흥분보다는 따뜻한 만족감이 일렁였다. 두 번째 응답은 우연이 아님을, 내 글이 가진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조용히 증명해 주었다. 그 순간은, 첫 번째 청탁보다 덜 극적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하게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창가에 앉아 청탁서를 다시 읽으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무도 몰랐던 자리에서 꾸준히 써 내려간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던 순간들이, 결국은 나를 이 자리로 이끌어주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조용히 자라나, 드디어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피어난다. 바다거북이 모래 속에서 천천히 부화하듯, 단풍이 한 잎 한 잎 물들듯, 각자는 자신만의 시간표를 갖고 있다. 너무 빨리 자라려 하거나, 남의 속도를 따라가려 애쓰는 것은 도리어 자신을 소진시킬 뿐이다. 눈에 띄지 않는 변화와 기다림은, 때로는 너무 느리게 느껴지지만 결국 스스로의 때를 안다.
나 역시 수없이 흔들렸고, 몇 번은 포기하고 싶었다. 낮에는 팀 회의와 업무 보고서 사이에서, 밤에는 빈 화면과 나 자신의 의심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이런 글로 정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작가들처럼 멋진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거듭되는 의문 속에서도, 어떤 직감이 나를 키보드 앞으로 다시 이끌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야 새벽이 오듯, 가장 외로운 글쓰기의 시간이 나를 진짜 작가로 만들어주었음을.
작은 화분에 물을 주듯 꾸준히 글을 쓰고, 또 썼다. 비가 올 때도, 마음이 어두울 때도, 기쁨으로 가득할 때도. 그렇게 하루하루 쌓은 시간들이 마침내 내 안의 꽃 한 송이를 피워주었다. 처음과는 다른 글이 써지기 시작했고, 더 단단하고 깊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남과 비교하며 쓰던 글이 아닌, 오직 나만의 목소리로 쓰는 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진실을 따라가는 글쓰기.
이제는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잠들기 전 침대에서도, 주변의 풍경이 문장으로 다가온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모두 글감으로 보이고, 사람들의 대화와 표정에서 이야기의 씨앗을 발견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빛깔로 빛나고 있다.
지금 당신이 아무도 모를 곳에서 무언가를 이어가고 있다면,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당장의 결실이 보이지 않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꾸준히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당신이 심은 마음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분명히 자라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음은 당신만의 색으로 피어날 것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기다림도 자람의 일부니까.
오늘도 나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다시 글을 쓴다. 여전히 고요하고, 여전히 혼자지만 이제는 안다. 이 조용한 반복이 결국 나를, 그리고 내 글을 키운다는 것을. 관심받지 못한 시간들이, 오히려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모든 꽃은 자신만의 시간에 피어나고,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다. 당신의 시간표도, 당신만의 리듬대로 움직이고 있다.
"당신이 심은 마음은, 언젠가 기다림의 시간을 이겨내고 꽃이 되어 피어납니다. 그러니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당신의 씨앗에 물을 주세요."
또! 청탁이 왔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고
이번엔 그냥, 기분이 너무 좋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 쓰고
매일 고치고
그냥 좋아서 했던 일이
이제는
“선생님 글, 저희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요”
라는 말로 돌아온다
이 말 한 줄이면
며칠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
두 번째 청탁,
나에겐 두 번째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