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7,500원짜리 연기 수업

삼류 배우의 비애

by COSMO

며칠째 방구석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영혼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커서는 30분째 제자리걸음이고, 머릿속은 답답했습니다. 공간의 환기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저는 수면 바지를 벗어던졌습니다. 그나마 무릎이 덜 튀어나온 바지를 입고, 노트북을 쑤셔 넣은 채 현관문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동네에 새로 생긴 노출 콘크리트 카페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람들은 저마다 맥북이나 태블릿을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7,500원짜리 아인슈페너를 주문했습니다. 창가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세팅하는 순간, 도파민이 퍼져 나갔습니다.


성공한 디지털 노마드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서 편집기를 여는 순간, 저는 제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집에서 글이 막힐 때 저의 행동 패턴은 원초적입니다. 의자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바닥에 대자로 드러눕습니다. 배를 긁으며 혼잣말을 내뱉거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합니다. 타인의 시선이 차단된 방구석에서 저는 짐승처럼 뒹굴며 첫 문장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사방이 탁 트인 이 힙한 카페에서는 그 어떤 야생성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대각선에는 전공 서적을 쌓아둔 대학생들이, 바 너머로는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의식 과잉에 사로잡혔습니다.


'대낮에 카페에 와서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있으면 영락없는 백수처럼 보이겠지?'

'뭔가 대단한 원고를 집필하는 프로 작가처럼 보여야 해.'


이 쓸데없는 강박이 발동하는 순간, 저는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를 연기하는 삼류 배우'로 전락했습니다.


머릿속은 비었는데,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타이핑 소리를 내기 위해 의미 없는 글자를 치고, 백스페이스로 지우는 기행을 반복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리는 연기도 곁들였습니다. 고뇌에 빠진 지식인처럼 보이기 위한 몸부림이었죠.


타자 속도가 느려지면 무능해 보일까 봐, 뉴스 기사를 그대로 따라 치는 짓까지 감행했습니다.


허세를 부리는 사이 두 시간이 지났습니다. 얼음이 녹아버린 아인슈페너를 들이켜며 모니터를 확인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완성한 문장은 세 줄이 전부였습니다. 글쓰기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멋진 프리랜서 연기에 다 써버린 결과였습니다.


비참하고 웃픈 상황이었습니다. 노트북은 방구석에 있을 때나 카페에 있을 때나 똑같았습니다. 변한 것은 오직 '남의 눈치를 보며 자세를 통제하는 제 자신'뿐이었죠. 글쓰기는 내면의 밑바닥까지 긁어모아 활자로 빚어내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아한 백조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 글이 써질 리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7,500원은 연기 수업료로 기부한 셈 치기로 했습니다.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카페를 빠져나왔습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외출복을 던졌습니다. 늘어난 수면 바지를 입고 책상 앞에 주저앉았습니다. 믹스 커피 한 잔을 타서 옆에 놓았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차단된 이 방구석.


허세의 힘을 빼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카페에서 쓰지 못했던 문장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다운 모습으로 활자와 뒹구는 시간. 그제야 진짜 이야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갔습니다.


멋진 프리랜서들은 발리의 카페나 세련된 공유 오피스에서 노마드 라이프를 즐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계형 작가인 제게, 최고의 작업실은 이 방구석뿐입니다.


글은 힙한 인테리어나 비싼 커피가 써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헐렁한 자세와 늘어난 수면 바지가 주는 무장해제 상태. 그것이 활자를 쥐어 짜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방구석에서 배를 긁으며 다음 문장을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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