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이 책은 ⟪한겨레 21⟫에 연재됐던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을 비롯, 각종 일간지와 문예지 등에 연재했던 글과 미발표 원고를 모아 엮은 것이다. 저자인 신형철 교수는 이번 저술을 위해 자신의 글을 다시 들여다보며 많은 글의 주제가 일관적으로 한 곳에 수렴하고 있음을 느꼈다. '슬픔'에 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받는 것도 타인의 슬픔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러한 슬픔을 이해하려는 노력 혹은 공부가 필요함을 차분한 문체로 써 내려간다. 특히 문학 평론가이자 비평가인 저자의 가치관, 열정, 고뇌를 더욱 진솔하게 풀어냄으로써, 문학과 독자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는 저자의 고독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책은 4부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 ‘슬픔’을 공부한 글, ‘소설’을 중점적으로 다룬 글, 참여적 주제의 글, 우리는 왜 시를 읽지 않으면 안 되는지에 관한 글로 구성됐다. 정확한 인식이 곧 정확한 위로다. 사람을 대할 때 대충 하는 칭찬이 신뢰를 얻을 수 없듯이, 위로하는 척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마음과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정확한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이다. 책도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위로가 되기 위한 글이란 작가의 타인의 슬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수조건이다. 감정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공감 대상의 시선으로 세상을 느껴보는 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이해하려는 노력, 즉 진지하게 타인의 슬픔을 공부할 때 가능하다. 우리가 슬픔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저자의 생각을 잘 나타내는 문단이라고 생각한다. <킬링 디어>를 기존의 영화 평론과는 다르게 기독교가 아닌 고대 그리스 신화로 해석하는 저자의 의견에 더 마음이 간다. 스티븐과 마틴을 아가멤논과 아르테미스의 갈등으로 치환한 것은 탁월하다. 영화에서 스티브 가족에게 비극을 선사하는 마틴은 그래서 예수보다는 아르테미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소개가 마음에 들어 늦었지만 영화도 감상할 수 있었다. 신형철 교수의 탁월한 해석 덕분에 딱딱하고 지겨울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다.
개인적으로 고대 그리스 문명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신화의 세계를 재해석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값진 영화 감상이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서양 문명을 이해하는 거대한 두 기둥이다. 특히 헬레니즘의 꽃은 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의 고전을 파악하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는 물리학의 원자론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다루는 주제는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의 초반부 상황을 이해하면 더욱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을 위해 트로이로 출항하려고 하지만 아르테미스의 저주로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띄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친다.
바람은 다시 불기 시작하고 연합군은 출항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딸을 인신 공양한 아버지 아가멤논은 결국 자신의 부인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 여기서 아르테미스와 아가멤논의 관계가 각각 스티브와 마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리스 문명은 서양 사상 이해의 기본 골격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슬픔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고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더 이상 너와 내가 함께하는 세상은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한계를 인정해 버리는 것에서 멈추는 순간 '사랑'과 '공감'같은 감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나의 슬픔을 느끼는 것을 넘어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려는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시가 필요한 이유. 순수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시가 아닐까? 유일하게 시만이 '좋아한다'를 넘어 '사랑한다'는 감정까지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객관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여타의 글과는 다르게 시는 반복해서 '낭독'할 때 진짜 시가 된다. 시를 통해 전달하려는 작가의 생각이 운율을 형성하는 음악적인 요소와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독자들은 감흥이 일기 때문이다. 함축적 의미의 단어를 리듬감 있게 이미지화하는 것은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시인은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는 신형철 교수의 진지한 작품 해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문학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올바른 비평가는 무엇인가?', '읽을만한 작품의 기준은 무엇인가?', '삶과 문학은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이에 대한 대답을 성실하게 해 나간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신형철 교수의 글은 ‘비범하게 평범해서’ 매력적이다. 무엇인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갈망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의 태도는 한편으로 ‘위로’를 한편으로는 ‘반성’을 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 타인의 슬픔도 ‘공부 혹은 배움’의 대상이 된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진정으로 완벽하게 ‘이해,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 노력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존재할 것이다.
어떤 비평가가 되길 원하느냐는 질문을 몇 번 받은 이후 나는 간결하고 명료한 대답을 준비해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최근 어느 대담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
▶︎ 이 책은 저자 특유의 진지한 작품 해설 외에도, 그의 ‘문학관’을 매우 충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기 즐겁다. 그는 “좋은 소설의 요건은 무엇인가?”, “평론가는 왜 대중의 적이 되었는가?”, “어떤 비평가가 되고 싶은가?” 등등 그간 받아온 질문들에 성실히 응답한다. 또한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고 실망감을 털어놓기도 하고, 노벨문학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등, 평론가의 생각과 일상을 동시에 펼쳐 보인다.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그의 책 ⟪아름답고 무의미한 Beautiful & Pointless⟫에서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 like'가 '사랑한다 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 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 ‘시’가 필요한 이유. 순수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시가 아닐까?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 <킬링 디어> 기존의 영화 평론과는 다르게 기독교가 아닌 고대 그리스 신화로 해석하는 저자의 의견에 더 마음이 간다. 스티븐과 마틴을 아가멤논과 아르테미스의 갈등으로 치환한 것은 탁월하다. 영화에서 스티브 가족에게 비극을 선사하는 마틴은 그래서 예수보다는 아르테미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 정확한 인식이 곧 정확한 위로이다.
비범하게 평범한 에세이
이런 분께 추천드려요!
따뜻한 글을 읽고 싶은 분
평론가의 생각이 궁금한 분
나와 타인의 관계를 고민하는 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저자 : 신형철
출판 : 한겨레출판사(2018)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