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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생 Sep 29. 2024

충분히 훌륭하지만 지극히 무관심했던 어머니

- 아이에게 유기.방임.학대는 범죄다.

엄마하면 떠오르는 음식들이 몇가지 있다. 지금도 어느 유명한 식당에서 맛볼 수 없는 손두부 그리고 된장 그리고 김장 김치, 콩나물 무침과 각종 나물들. 이것들은 살면서 많은 맛집들을 다녔어도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솜씨를 뛰어넘는 가게를 만난 적이 없다. 어머니는 요리 솜씨뿐 아니라 만능 재주꾼이었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1000평이 넘는 밭을 혼자서도 이것저것 심어 먹거리들을 키워냈고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어머니의 삶은 대하드라마같은 서사를 가졌다. 사람이 그렇게 사는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한 삶을 어머니는 긴 시간 혼자 이겨내며 살아냈다. 어머니 앞에서는 그 어떤 힘들일도 힘들일이 아니었으므로 난 한번도 어머니께 불평과 불만을 포함해 그 어떤 요구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삶 이하는 힘든게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긴 세월을 견뎌내고 5남매를 홀로 키워낸 어머니는 동네와 집안에 '숭고함'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자부심으로 지난날들을 모두 보상 받는 듯 해보였다.  어느 본인의 생일날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본심을 꺼내기전까지는.


"인생 참 허무하다"


엄마는 동네에서도 친척들 사이에서도 자식들 사이에서도 공인된 '훌륭한 여인'이었다. 한량 아버지의 극악스러운 무책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자식들은 모두 반듯하게 컸고, 모두 제 몫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식들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거나 남들이 알아주는 성공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잘사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작은 시골에서 자식들 모두 공부를 잘해 대학을 간 것은 우리집 형제뿐이었고, 친척들 중에서도 우애좋은 우리 형제들은 늘 모범이었으니. 나 하나만 빼고.


그러니 순간 나는 나 들으라는 소리인줄 알고 자격지심이 발동해 화들짝 놀랐다. 돌도 되지 않은 나를 받아 키우면서 키운 공이 전혀 없다는 소리로 들렸던 건 나의 자격지심인게 분명할 것이다. 나는 오빠와 언니들처럼 어떤 기관이나 그럴듯한 회사에 들어가지 못했고, 때마다 묵직한 돈봉투를 건네고 있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자잘한 근심거리들을 안겨주어 어머니의 주름을 깊게 파이게 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삶을 허무하게 만들었나 죄책감이 슬며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 과거의 어느날 어머니가 혼자 한숨섞인 말을 내뱉었던 그 날이 기억 속에서 소환되었다. 내가 어떤 일로 무엇으로 어머니를 실망시켰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말은 내 마음에 깊이 박혀 있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내가 잘못된 사람이 되었다는 건가? 어머니는 나의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엄마가 대체 날 어떻게 키웠길래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관심이 없었고, 한살 한살 먹어가며 마땅히 가르쳐주어야 할 것들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모든 일들을 그냥 '어깨너머'로 '눈치껏' 배워갔다. 그렇게 늘 겪지 않아야 할 시행착오들을 겪어야 했고,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상황들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내가 열이 펄펄 나기전까지는 다치고 들어와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난 어릴때 잘 아프지도 않아서 국민학교 6년 개근상을 탔다. 그러다가 중학교때쯤 며칠이 열이 나서 학교도 못갈 정도가 되었을때 어머니는 아픈 나를 두고 눈을 흘기며 약을 가지고 들어와 혀를 찼다. '왜 아파서 사람을 귀찮게 하냐'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도 나는 그때 약을 들고 들어오던 어머니의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남아있다.


'난 아파도 안되는 사람이구나'


그 뒤로 나는 아픈 적이 없다. 아파도 얘기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개울에서 수영을 하다가 발 뒤꿈치를 돌에 찍혀 피가 철철 나도 오히려 혼날까 상처를 숨겨야 했다. 학교에서 사오라는 소고를 사달라는 소리를 못해 친구꺼를 훔쳐서 내 이름으로 바꿔 써놓는 어리섞은 수를 쓰다가 들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겨울에도 따뜻한 보온 도시락을 갖고 다니던 친구들이 부러워도 플라스틱 도시락에 싸온 찬밥에 목이 메여도 불평하지 않았다. 신고 있던 신발이 작아져서 발가락을 구부리고 다녀야 했어도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신발이 구멍이 나서 물이 들어와 비오는 날이면 신발이 젖어도 신발을 알아서 사다 줄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발을 바꿔준 것은 항상 나이차가 많이 나서 돈을 벌던 언니들이었지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래...그런 것들은 가난했으니까, 어머니가 한량인 아버지를 대신에 그 모든 책임을 떠 안아고 살았으니까, 하늘을 떠받치고 사는 책임감의 무게로 인해 작고 어린 나는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치자. 그래 그건...이해할 수 있다. 아니 충분히 이해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넘치도록 이해한다. 내가 어머니라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과 고단함을 감히 모두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무런 권리없이 의무와 책임을 다했던 어머니는 훌륭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난 어머니의 훌륭함의 증표이자, 아버지의 과오일뿐 사랑받고 보호받는 아이가 아니였다.  문제는 방임되어진 아이들은 자칫 못된 남자들의 타킷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늘 관심과 정에 굶주린 나는 조금만 친절하게 다정하게 대해줘도 경계심을 풀곤했다. 유혹과 친절을 구분하지 못했고, 친절과 동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내 그렇게 못된 성인 남자들의 수없이 많은 성추행에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일어난 그 못된 짓을 못된 짓인지 인지하지 못했고, 어머니에게도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한 채 성장해야 했다. 말했다가는 그 모든 일이 내 책임이라고 할까봐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까봐 두려웠다.


내게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성인되어서야 알게 되고 얼마나 아찔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사는 일이 버겁고 힘들었어도 최소한의 보호는 해주어야 하는 게 어머니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내게는 유일한 어머니가 내게 얼마나 무심했으면 마땅히 얘기해도 될 일들을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왔을까. 아마 얘기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깊은 절망과 무기력'을 어린 나는 일찍이도 학습했을 것이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거야"


어머니는 대단히 훌륭한 여인이었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존경스러운 어머니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고아원 원장' 같은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삶에서 나는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 더 올리느냐 빼느냐의 차이밖에는 없었다. 어떻게 혼외자인 날 받아주고 키워준 어머니에 대해 고마움은 없냐고 물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내가 등장하기 전이나 후나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한량 남편'때문에 힘들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내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같았다고 큰언니가 말해주었다. 큰언니가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다닌 기억이 선명하다고 말했다. 내가 감사할줄 모른다고? 날 받아준 그 사실에 감사해야했기에 난 아무런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밥만 먹여줘도 고마워해야하는 처지라 난 명절때마다 온 집안의 심부름도 모자라 일가친척들의 자잘한 물 심부름까지 도맡아야 했다.


낳아준 엄마와 키워준 엄마,  나는 엄마를 둘씩이나 었으면서 엄마가 없는 사람과 다를 없었다. 한 사람은 날 버렸고, 한 사람은 곁에 두기만 했을 돌보거나 보호주지 않았다. 이런 내가 어떻게 낳아준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날 키워준 것에 감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두 여인에게 하고 싶은 솔직한 말은 이것이다. 내가 바란 것은 엄청난 지원이나 사랑이 아니었다고. 인간으로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어른이 아이에게 마땅히 해야할 것들을 원한거라고 말이다.


"버릴 바에는 낳지 말지 그랬어요.

최소한의 보호도 해주지 않을 거면 날 키우지 말지 그랬어요"

 


내가 원한건 그냥 평범한 엄마였다. 내가 내 아이들을 기르고, 남의 아이들을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절절하게 느끼는 무거운 인생 진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사람은 엄마없는 사람이라는 것과 세상의 가장 큰 복은 '부모복'이라는 것이다. 부모의 존재는 특히 엄마의 존재는 한 인간의 평생을 좌우하는 어마무시한 존재라는 것을 내가 엄마로서 선생으로 살면서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뼈저리다'라는 말의 의미를 정말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로서, 선생으로 살면서 만나고 보아왔던 수 많은 아이들 중에 마음이 아팠던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가 최대 가해자'였다. 그것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아이들을 망치고 있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특히 어떤 엄마를 만나냐에 따라 아이 인생이 결정되어 가는 무서운 광경들을 오랫동안 보아왔다. 인간 개인의 의지와 노력이란것이 얼마나 하찮은것인지...


인간은 사랑받지 못하면 둘 중 하나가 된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 되거나 범죄자가 된다. 그래서 부모가 절대 자식에게 하지 말아하는 3대 행동이 있다.

버림. 학대. 방임은 아이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범죄행위다. 인간은 어린시절 중에 하나만 겪어도 평생 인생이 슬프고 괴롭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경험적 사례로도  이 3가지 행동만 하지않아도 충분히 훌륭하고 좋은 부모이며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잘 자란다는걸 알게 되었다. 사실 좋은 부모가 되는건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망가지고 부셔져야 마땅했는지도 모른다. 난 아주아주 운이 없게도 어린시절 경험하지 말아야할 이 3가지 모두를 경험했으니 그게 더 자연스럽다. 생모는 날 버렸고, 내게 유일했던 어머니는 날 방임했고, 내가 만난 몇몇 성인남자들은 날 신체적으로 학대를 했다. 그런 내가 자살하지도 , 타인을 해치지도 않은 정상범주의 인간으로 성장해서 결혼해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엄마로서 선생으로서 내 몫을 해나가면서 사는 기적의 비밀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인간은 단 한사람의 사랑으로도 인생이 망가지지 않는데, 그 사랑을 주는 단 한사람이 내게도 있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날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 큰언니....그런데 불운을 달고 사는 사람에게 뭐하나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 하필이면 가족 중에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큰 언니의 약혼식날. 어린 난 평생 지우지 못할 트라우마를 얻게 되었다.


난 또 다시 모두에게 버림받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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