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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생 Oct 03. 2024

슬플때는 언제나 그 날 그 시간으로

슬퍼도 살아갈 것이다.

나의 핵심 감정은 '슬픔'이다. 살면서 다채로운 감정들을 느끼는 순간에도, 심지어 가장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도 언제나 그 감정들 속엔 슬픔이 채색되어 다. 단 한번도 살면서 온전히 기쁘거나 온전히 즐거웠던 적이 없다. 언제나 다른 감정에 슬픔은 덧붙여 따라다녔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나는 왜 언제나 슬프지?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란게 있다.  법칙은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나타남을 뜻하는 통계적 법칙이다. 또는 재해 연속성 이론이라고도 하는데,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업무 성격상 수많은 사고 통계를 접했던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 분석을 통해 하나의 통계적 법칙으로 발견하였다. 어떤 중대한 산업재해가 1건 발생하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미한 산업재해가 29건, 그리고 산업재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징후가 300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수 자체가 아닌 산업재해와 그 징후의 비율이다. 이는 대부분의 참사가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원인을 파악, 수정하지 못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살면서 언제나 슬퍼야만 했던 이유와 관련된 기억 하나. 사실 그 기억은 그저 한가지 사건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이지만 하인리법칙처럼 내게도 얼마간의 작은사건, 수없이 많은 자잘한 징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중요한 사건이다. 내가 어린 시절 어떻게 성장해왔고, 나의 가족들은 그 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나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날의 그 일은 내게 재해와 같다. 충분히 예견되었고 막을 수 있었던... 적어도 단 한 사람의 어른이 내 눈과 귀를 막아주기만 했더라면., .

 



"큰언니는....."


이 말로 시작하는 큰 언니에 대한  어머니의 이야기들 속에는 큰딸에 대한 아주 강한 신뢰와 사랑이 묻어 있다.  큰 언니는 맏딸의 역할을 평생 해오면서 단 한번도 동생들한테 투덜대거나 생색을 내본 적이 없다. 집안의 궂은 일들을 챙기고 자기 몫을 동생들에게 내어주고, 게다가 마음처럼 얼굴도 예쁘고, 그러고도 공부는 어찌도 그렇게 잘했는지 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한국은행에 취직을 했더랬다. 지금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대학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고졸에 대한 차별이 없어서인지 여하튼 그랬다.


큰언니는 어머니의 자부심이고 자랑이었다. 어머니에게서 '큰언니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레파토리가 흘러나오면 나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살면서 그것이 어머니가 큰언니를 편애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 역시 가족 중에 큰언니를 가장 사랑했다. 어머니가 하는 큰언니에 대한 말들은 어린 내가 보아도 모두 사실이었다.


열여덟살 많은 큰언니는 내게 유일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고, 언니가 결혼하기 전까지 내겐 엄마같은 존재였다. 잠도 큰 언니 옆에서 꼭 붙어잤다. 발에 열이 많아 다른 사람 몸에 발을 올릴라치면 무섭게 내치거나 꼬집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언제나 자기 몸에 내가 발을 올리고 자는 것을 허락한 유일한 가족이었다. 큰언니는 내가 알 수 없는 피부염을 앓아 가려워 밤마다 긇고 진물이 흐르는것이 안타까웠는지, 불로초라 불리는 영지버섯을 구해와 끓여 목욕을 시켜주기도 했다. 또 내게 처음으로 생일케이크를 사준 사람도 큰언니였다.  어린 시절 따뜻했던 몇 안되는 기억들은 전부 큰 언니와 연관되어 있다. 큰 언니는 나의 생명줄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언니가 더 오래 오래 내 옆에서 있어주길 바랬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열살의 나는 예쁘게 머리를 땋고 새옷을 입고 언니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그날 입고 있던 새옷이 내내 덥고 몹시 까칠거려 불편했다. 옷을 다 벗어버리고 싶었는데 실은 그게 옷이 문제가 아니라 언니가 결혼을 해서 나를 떠난다는 사실이 몹시 슬펐던 것이었다. 언니의 결혼식을 다녀 온 뒤 나는 집에 돌아와 누가 듣지 않도록 두꺼운 이불을 꺼내 뒤집어 쓰고 펑펑 울었다. 모두가 축하해주고 언니는 행복해보였는데, 난 슬픔을 넘어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언니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 같았다. 언니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했던 것 같다. 나만 사랑해주길 원했던 같다. 그런데 그런 언니가 내 곁을 떠났으니 세상이 흔들렸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우는 걸 들키면 난 내가 왜 우는지 설명할 수 없으니까....그날의 그때처럼 말이다.




큰언니가 결혼하기 1년 전 내가 아홉살때, 우리 집에서 양가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약혼식을 했다. 지금은 약혼식을 거의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양가 부모나 형제 정도 모여 상견례를 대신한다. 하지만 그때는 한정식집이나 신부집에서 제법 크게 약혼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모양이다. 그날 많은 낯선 이들이 우리집으로 모였고, 모여든 이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있었는데 우리 큰 언니에게 굉장히 친한척 가서 안기는 모습에 화가 났다. 내 언니인데....하는 어린 마음에 질투가 났던 모양이다.


그렇게 양가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드디어 약혼식이 시작되었다. 화사한 한복을 입고 평소와 다르게 화려하게 화장을 한 언니의 모습은 매우 예뻤다. 나는 그런 큰언니를 바라보면서 같이 설레임을 느끼고 있었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약혼식 진행을 맡은 작은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도 오래전이라 구체적인 그날의 일들에 대한 기억은 이 정도다. 모두 예상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잔치가 벌어지는 풍경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까지는.


작은 아버지는 가족들 하나 하나를 호명하며 큰언니와의 관계를 설명해나갔다. 그렇게 내 차례가 가까이 왔고, 어린 나는 내가 소개되면 어떻게 말해야할까를 고민하면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큰 언니의 약혼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시작을 할까? "안녕하세요, 저는 큰언니의 막내 동생입니다"라고 시작할까? 그렇게 점점 내 차례가 가까워지고 심장이 더욱 요동치면서 내 얼굴은 상기되었다. 오빠가 소개되고 뒤 이어 둘째 언니가 소개되었다. 이제 셋째언니 다음이 내 차례다. 똑부러지게 잘해야지 다짐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버지는....


"네! 이제 우리집 막내만 남았습니다. 우리 집 막내는...."


요동치던 심장은 갑자기 멈춰버렸고, 상기되었던 내 얼굴은 핏기하나 없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 귓가에는 '우리집 막내는...우리집 막내는....우리집 막내는....'이란 말만 리플레이되었다. 우리집 막내는 난데, 왜 바로 위에 언니를 우리집 막내로 소개를 하나.....그때 그 자리에서 "어? 저 여기있어요! 내가 이 집 막내예요"라고 말했어야 했다. 난 분명 그래도 되는 천진한 아홉살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대체 왜 그 자리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지 못했을까? 아니...왜 가족들은 우리 @@이를 빠뜨렸다고 말하지 않을까? 내가 엄마를 아빠를 언니들을 오빠를 쳐다보았는데, 아무도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어리고 똑똑했던 나는 알았던가보다.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한가지 사실은 알았던 것 같다.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란 것을....그 동안 동네 사람들이, 친척들이 나를 두고 왜 수군댔는지, 어떤 이는 나에게 눈을 흘기고, 어떤이는 나에게 동정의  눈을 하며 바라보고, 어떤이는 미움의 눈을 하며 바라보았는지를...분명하게 난 거기에 끼면 안되는 사람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뒤돌아 그 자리를 떠나 혼자 마당에 나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온 몸에서 피가 빠져 나가는 느낌,.. 영혼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새옷에 오줌을 쌌다.

 모두에게 버려졌는데 창피함이 대수겠는가! 그냥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내 인생은 경로를 이탈하고 말았다.  내게 깊게 새겨진 그 날의 '버려짐'은 고통 아닌 공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사는 내내 속이 상하고 슬프고 절망스러울때는 언제나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로 돌아가 마당에 덩그러니 놓인 아홉살 소녀가 되어 버린다. 슬플때는 언제나 그 시간으로....


슬픔...상실감...

그렇다. 내 인생이 사는 내내 슬펐던 것은 상실했기때문이다. 낳아준 엄마를 잃고, 돌봐주던 언니를 잃고 가족과 친척들에게 존재를 부정당해 나의 자리를 잃었다. 유일하게 사랑을 주던 큰언니는 결혼을 해서 어린 내 곁을 떠났고 명절날과 여름 휴가때만 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또 한번 엄마를 잃어야 했다. 나를 보호해주고 아껴주고 사랑을 줘야 사람들은 날 버렸고, 길을 잃었다. 나는 그런 취급을 당해도 아프다 힘들다 울기는 커녕 말하지 못했다.  사실상 모두에게 버려진 아이였다.


내가 그 날을 계속 떠올리는 것은 속이 좁아서도 아니고 미련해서도 아니며 그 슬픔과 고통을 떨쳐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더더욱 내 의지와는 무관하다. 단순히 내 기억이 아닌 나의 몸이 그날을 기억한다. 그날을 떠올리는 동시에 심장이 내려앉고 뇌는 일시정지가 되며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다시 버려진 소녀가 된다. 버려지는 경험을 살면서 수천번을 반복하는 셈이다.


언제 괜찮아지냐고,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명상을 하면 낫는다는 소리는 집어치워라. 트라우마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특히 어린 시절 지속된 가족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삶을 지배해버린다. 난 어쩌면 평생 괜찮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그 사실은 내 뜻과 상관없이 내게 일어난 일이고 난 불행히도 그런 경험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앞으로도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애써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사실을 지우려고 모른척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슬픔으로 채색된 삶이어도,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것이다.


슬퍼도 살아갈 것이다.
그게 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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