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출생때문에 형성된 습관인지 나는 다른 사람들이 고민하지 않는 것들을 고민하며 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품지 않고 당연시하던 것들에 질문을 던지며 다시 생각하고 본질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매년 돌아오는 달갑지 않은 생일도 나에게는 그 중 하나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생일을 기념하게 되었을까?
오늘날 생일 축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 의식은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비롯된다. 케이크 위에 촛불을 켜두는 관습은 희랍인들에게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매월 여섯째 날 즉 달의 신 ‘아르테미스’의 출생일에 달처럼 둥근 달콤한 과자에다 여러 개의 가는 초에 불을 붙여 이 여신의 신전 제단 위에 놓았다고 한다.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자, 사냥의 여신이기도 하지만 다산을 관장하며 산모들이 무사히 아이를 낳고 살 수 있도록 보호해주고 건강을 유지시키는 조산사 역할도 한다고 전해진다. 또 그리스인들은 보호 신령(그들이 다이몬이라고 부르는)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 신령은 한 사람이 태어난 날에 나타나 평생 동한 그 사람과 동행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전해졌다.
또 민간 신앙에서 생일 촛불은 소원을 들어주는 특수한 마법을 지니고 있어서, 촛불과 제물을 바치는 불은 인간이 처음에 신들의 제단을 세운 이래 특별한 신비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생일 촛불은 생일을 맞이한 사람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행복과 복지가 계속 보장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나이만큼 꽂아도 되고, 심플하게 하나만 꽂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사실 나는 내 아이들이 태어나고 해마다 탄생을 축하는 일들이 어색했다. 그 '어색함'의 정체는 분명치 않지만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도 아니다. 내 입장에서 생일이 정말 축하 할 일이 맞는가하는 깊은 의문이 사는 내내들었기때문이다.
태어나서 정말 기쁜가?
정말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태어나서 기쁘냐고 말이다. 난 한번도 내가 태어나서 기쁜 적이 없다. 태어나서 단 하나뿐인 지구에서 인간으로서 사는 행운을 누려 기쁘지 않았다. 태어나서 지금의 나로 사는 일이 전혀 뿌듯하지 않았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구가 어떤 별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몰랐을테니 좋고 나쁘고 할 게 없지 않은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살면서 느껴야했던 수많은 수치와 굴욕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태어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슬플일이 없지 않았겠는가...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존재에 대한 번민속에 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난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열심히 살아야했고, 잘 살고 싶었다. 그냥 그래야할 것 같았다. 죽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사실은 그게 가짜 마음이란 것은 진즉에 깨달았다. 잘 살고 싶은데 잘 안되니 속상했던 것이고,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절망스러웠던 순간에 드는 마음이었다. 난 살고 싶었고, 이왕 살거 최선을 다해 잘 살고 싶었다. 이게 진짜 내 마음이었다.
그런데 사는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알지 못한 채 아주 오랜 시간을 '그냥 흘러가는대로 ' 살았던 것 같다.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조차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니 너무 당연한 수순으로 삶의 의미는 더더욱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마음 둘곳만을 한참을 찾아 헤맸던 것 같다. 그러다 이 사람인가 싶어 결혼을 했고, 어쩌다 엄마가 되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아이를 낳고 기르는 무서움을 몰랐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다. 낳고 보니 걱정되었고 두려웠다. 엄마가 되기전까지는 하던 일들이 잘 안되면 도망가면 되었다. '회피'하는 것은 가장 미숙하지만 가장 손쉬운 문제 해결책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엄마가 된 이후로 더 이상 그건 문제 해결이 아닐뿐더러 문제를 낳고 심지어 문제를 더 커지게 만든다는것을 깨달았다.
매년 아이들의 생일을 기념하면서 나 혼자 되물었다.
내 아이들은 태어나서 기쁠까?
벌써 올해가 딸은 열 일곱번째, 아들은 열 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아이들의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뻔하디 뻔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의 눈빛을 살폈다. 태어나서 기쁘지 않은내가 매해마다아이들 생일을 기념하면서 드는 생각.
내 아이들은 태어나서 감사하며 자신으로 사는 것이 기쁠까? 당연히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없는 감정이니 매년 아이들 생일에 난 아이들의 표정과 눈빛을 살핀다. 진심으로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면서, 아이들이 자신으로 사는 것에 자부심을 갖길 바라면서. 나를 엄마로서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라면서....
어쩌면 내 인생은 고장나도 충분한, 마땅히 그게 어울리는 탄생과 성장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이 망가지지 않은 것은 내게도 '사랑' 그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내가 간단히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받은 사랑이 순도 100%의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런게 어디 있냐고 되되묻는다면 할말이 없다. 하지만 난 그런게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느끼는 마음, 그리고 내 반려견에게 느끼는 마음이 그것이다. 내 것을 내어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뿐더러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운 존재들에게 느끼는 그 순도 100%의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다.
여하튼 내게 사랑을 준 유일한 가족인 큰언니가 내게 주는 사랑의 마음에는 '동정'과 '도리'가 섞여있다. 그건 받는 내가 안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눈빛에 예민했던 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 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별개로 더 많은 것들을 읽는다. 나의 잘못된 해석일때보다는 소름끼치게 정확했던 적이 더 많아서 나는 어떤 사람과 대화할때 그 사람의 말보다는 눈빛에 더 집중한다. 얼마나 진실된 말을 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자가 눈빚이기때문이다. 그런데 큰언니의 눈빛에는 언제나 저 두가지가 섞여있다. 날 가엽게 여기는 마음과 좋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하는 도리.
여하튼 큰언니는 언제부터인지도 기억나지도 않는 매년 내 생일에 축하한다는 메세지와 함께 여전히 용돈을 보내주고 있는 사람이다. 마흔 일곱번째 생일인 올해도 역시나 내 통장에는 어김없이 생일 축하 용돈이 찍혀있었다. 그것도 물가 상승을 반영했는지 10만원을 더 올려서....
난 큰언니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언니, 늘 한결같이 옆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큰언니에게 보낸 내 고마움의 표현은 진짜지만 솔직히 아무도 내 생일을 챙기지 않으면 좋겠다. 그냥 생일을 챙겨야겠다면 매년 12월31일에 한해 수고많았다는 격려를 해주면 좋겠다. 지금의 내 생일은 진짜 생일이 아니다. 사실 난 태어난 날도 정확히 모른채 살아왔다. 아버지는 진짜 내 생일도 모른채 날 데리고 왔다는 얘기다. 생모는 내가 태어난 날을 기억할까? 여하튼 내 생일도 아닌 날에 생일 축하 메세지를 받고 선물을 받는 일이 어떤 기분인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내게 생일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매년 내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날
매년 내가 아버지의 과오로 존재한다는 것을 뉘우쳐야 하는 날
내게 생일은 태어나서 기쁘고 축하받는 날이 아니다.
매년 내가 그때 왜 가족으로 소개되지 않았는지를 되새김하는 날이며
내게 생일은 내가 버려진 아이라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내게 생일은 슬픈 날이다.
나의 올해 생일에 30년된 절친이 예쁜 팔찌와 함께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여전히 달갑지 않은 생일이지만 친구의 마음이 담긴 메세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