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특히 함께 생활하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내 마음속 억울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 등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그 무엇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쌓아두기만 하면 사춘기가 다가오는 고학년 시기에 말과 행동이 삐뚤어지기도 한다. 마음에 더 이상 여유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며 이는 하나의 시그널이다. 이러한 시그널을 나는 잘 알아차리는 편이다. 비슷한 심리적 환경을 살아낸 나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사는 동안 공감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나의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다. 아이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도와주고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따뜻한 공감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참 어렵다.
성인이 되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공부의 시작이 ‘상담’ 공부였다. 공부의 시작은 다의어로서의 '상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초임시절 어린 나이에 학부모님과 ‘상담’을 하려하니 무슨말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막연히 ‘상담’ 공부를 하면 '상담'을 잘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근처 대학교 야간 강좌를 신청했다. 다의어의 잘못된 해석을 통해 우연히 입문한 상담 강좌에서 나는 나를 만났다.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의 성격적 특성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등 많은 질문들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심리학의 세계는 경이로웠고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상담가를 꿈꿨던 나는 돌고돌아 상담을 잘 하는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랜 시간 상담관련 도서를 읽고 공부를 하고 나를 돌아본 경험으로 인해 누군가의 아픔이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상황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나의 강점이다. 하지만 진심어린 공감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은 나의 큰 취약점이다. 아마도 삶의 과정에서 진심어린 공감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던 것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한다.
떡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받아본 적 없는 공감을 어떻게 해준단 말인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공감’을 잘 하지 못하는 내가 나의 가장 큰 취약점이 되었다. 육아장면에서도 아이들이 폭발적으로 감정을 쏟아내면 그 감정을 알아주고 공감해주기 보다 아이들의 말에 자극받아 더 크게 화를 내거나 변명조의 말을 내 위주로 쏟아내고는 한다. 그리고 상황이 지나간 후 정신이 번쩍 들면서 후회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따뜻한 말로 공감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마음이 스르르 풀리고 얼굴이 밝아지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현실은 잘 되지 않으니 속상할 때가 많다.
얼마 전, 제목에 이끌려 수강했던 ‘비폭력 대화’를 통해 나의 취약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평일에 강좌를 수강하고 주말에 모여 실습을 했는데 ‘경청’과 ‘공감’을 줌심으로 이루어졌다. 비폭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덜폭력적인 대화’를 하고 싶었던 나에게 아주 큰 의미로 다가왔던 강좌였다.
강좌를 통해 발견한 희망적인 메시지는 ‘공감적 듣기’에도 갖추어진 형식과 틀이 있으며 꾸준히 반복적으로 연습하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선천적 결점을 후천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희망과 노력의 의지를 가지게 해주었다. 관련도서를 구입하고 시간을 내어 읽어보고 연습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먼저 일상에서 연습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해본다. 아이들과의 감정적 충돌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이 말을 해야겠다. “지오야, 잠깐만 기다려봐 엄마가 할 말을 좀 정리하고 있어.”
매우 부자연스럽지만, 될지 의심이 되지만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보면 머지 않은 언젠가 ‘무의식적’으로 공감이 먼저 나오는 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취약점이 강점이 되는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