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띠 프랑스
양식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먹은 적이 없다. 그렇기에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환상을 스스로 깨는 과정에 도전했다. 프랑스 코스 요리다.
코스 요리는 어떻게 구성되는 것일까? 에 대한 지식은 안타깝게도 내게 없다. 여기저기 웹을 뒤적여 찾은 바는 이렇다.
식전주로 시작하여 전채 요리를 내고, 수프나 샐러드를 낸다. 그런 다음에 생선 요리를 거쳐 고기 요리를 내고 마지막으로 디저트와 커피 등을 즐긴다.
슥슥 넘기며 보았기에 정확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대강의 분위기와 느낌을 간직한 채 도전했다. 걱정스러운 건 생선 요리였다. 마음에 품었던 요리는 '대구 파피요트'였다. 선정 이유는 간단했다. 이름이 낯설어 멋지다!
책상에 앉아 꾸린 메뉴 구성은 이렇다.
새송이 버섯 구이 → 양파 수프 → 대구 파피요트 → 안심 스테이크 → 아이스크림 올린 인절미 호떡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트에 갔는데 손질된 생선살은 팔지 않았다. 머리가 온전한 대구는 매운탕 양념과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당황한 나는 마트 구석에서 휴대전화를 붙들고 해결법을 수소문했다. 그러다 가자미로도 파피요트가 가능하다는 글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판매 중인 가자미는 머리가 없었다. 물론 저녁 할인이 적용되었단 점이 매력적이기도 했다.
샀던 당시에는 사진 우측 상단에 슬쩍 보이는 주황색 무언가가 잘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머리와 지느러미가 잘렸으나 이 역시 손질이 다 된 건 아니다. 아마 가자미를 집었던 시점에 내 두뇌는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쳤으리라.
"머리가 없어!"
"손질이 된 게 분명해!"
"몸통이 두 개야! 반으로 갈라서 한쪽씩 포장한 게 분명해!"
어류 손질에 있어서는 쓸모없는 두뇌 활동이었다. 포도당이 아까울 지경.
급하게 가자미 손질하는 방법을 검색했다. 우선 비늘을 벗기고 포를 뜬다!
칼을 갈고 비늘을 쓱쓱 벗겨 물에 씻길 반복했다. 육안으로는 전후의 차이를 느끼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칼날에 비늘이 묻어나지 않으면 됐겠거니 했다. 비늘이 머리에서 꼬리로 놓인 모양이어서 꼬리에서 머리 쪽으로 칼을 움직였다.
미리 재료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감자 껍질을 깎다가 손톱과 그 아래 살을 함께 깎았다. 그래서인지 이후 작업이 좀 어설펐다. 온전한 손으로 시도한다면 한 손으로 꼬리를 단단하게 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방향으로만 비늘을 벗기지는 않는다. 때때로 몸통에서부터 지느러미 방향으로도 벗긴다. 그 반대 방향이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앞뒷면 모두 몸통 가운데에 선이 있다. 비늘을 벗긴 뒤에도 까슬까슬함이 느껴지는데 여길 자르다. 척추가 남아 있기에 몸통이 반으로 갈리지 않고 뼈가 있는 지점에서 칼이 멎는다.
그러면 이제 몸통 테두리에 칼집을 넣는다. 그리고 가운데 선에서부터 테두리 방향으로 슥슥 칼질을 넣어 포를 뜬다. 그렇게 한 면에 두 장씩, 총 네 장의 생선 포를 얻을 수 있고 뼈가 붙은 한 장의 포가 남는다.
참고한 영상들에서는 지느러미 가까운 부분을 조금 남겨 포를 떴다. 그러니 한쪽 면에서 두 장의 포를 뜬 다음에 남은 생선은 ㅂ 모양이 되었다.
다만, 파피요트를 소개하는 영상들에서는 가자미 손질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자미 손질 영상은 대부분 회나 기타 한식을 위한 과정이었어서 실상 파피요트를 위한 손질은 다를 수도 있겠다.
본래 가자미의 크기에 비해 얻은 포가 너무 초라하다. 게를 식재료로 쓸 때에도 수율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그렇게 보자면 형편없는 수준의 수율이다.
총 8장의 가자미 포를 얻었고 이를 맛술에 담가 놓는다. 레시피에서는 화이트 와인에 담그라 했는데 초장부터 제멋대로.
이어서 안심 손질에 들어간다. 동네 마트에서는 예산에 맞는 물건이 없었다. 결국 창고형 매장에서 호주산 리테일 팩 2kg을 구매했다.
같은 제품을 산 사람들이 더러 손질 후기를 남겼기에 참고했다. 가장 크게 도움이 된 블로그는 이렇다.
제품명에 곡물 안심이라는 말이 있어 "곡물을 먹였으니 안심하고 드세요~"라는 뜻인 줄로 생각하기도 했다.
안심살 맞다.
블로그를 참고했으나 고기 모양이나 저마다 다르다 보니 이게 맞나? 이게 맞나?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지방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뜯어낸다.
그리고 위 사진에 있던 은빛 부위는 어째 뜯어내야 할 것 같아서 조금씩 조금씩 칼집을 넣어 뜯어냈다. 얇은 막처럼 되어 있어 아래에 바로 살코기가 있다. 상상력으로는 근막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얀 것은 지방이고 붉은 것은 고기라는 게 내게는 전부였다. 작업을 하다 보니 손으로 꾹 눌렀을 때 단단하면 뜯어내는 대상으로 판단했다. 지방이니까 차가운 환경에서 딱딱하게 굳은 게 아닐까.
애써 칼집을 넣으며 손질하다 보니 고기가 난도질되고 말았다. 양념에 재우면서 잘 스미라고 칼로 찌르기도 한다니 미리 했다고 생각하자.
손질되지 않은 안심은 중심으로 기다란 줄기가 있고 한쪽에 화살촉처럼 두툼한 부분이 있다. 손질하다 보면 그게 어느 부위이고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감이 온다는데 사실 자른 뒤에도 잘 모르겠다.
리테일 팩은 포장되었을 때에는 도마 안에 모두 담기는 길이였으나 포장을 뜯으니 그렇지 않았다. 고기를 반으로 접어 넣은 모양새다. 그래서 고기를 모두 올리기에는 도마가 짧아 한쪽을 싱크대 쪽으로 늘어뜨렸다.
큰 줄기 중심으로 먹을 만큼을 잘라냈다. 그리고 대부분은 소포장해서 냉동실로.
지난밤에 미리 손질한 재료로 본격적인 조리를 시작한다. 곧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새송이 버섯을 잘라 칼집을 내고 굽는다. 약간의 간만 더해서 끝.
양파수프는 전날 연습했는데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한 줄로 평을 하자면 "뜨거운 물과 거기 담긴 양파". 스스로 생각한 실패 요인은 양파가 적고 물은 많았기 때문.
양파를 느긋하게 2~30분 볶는다. 버터를 넉넉하게 넣으니 중간중간 화이트 와인을 넣지 않아도 타지 않는다. 물론 난 화이트 와인이 없다.
양파 수프에 마늘바게트를 올린다. 그런데 마늘바게트를 살 생각은 하지 못하고, 바게트를 사서 마늘 바게트를 만드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다.
에어 프라이기로 마늘빵을 만드니 그냥 "구운 바게트와 마늘 부스러기"가 되었다. 마늘을 좀 더 작게 다져야 했다. 그래도 저녁 늦게 사서 흐물흐물했던 바게트가 좀 단단해진 것은 만족스럽다.
그런 사이 양파가 갈색이 되면 물을 붓는다. 양파는 4/5 개 정도를 썼고 물은 200밀리리터 정도를 넣었다. 소금으로 간을 하고 마법을 기대하며 치킨 스톡을 넣는다.
그리고 그 위에 마늘 바게트와 피자 치즈, 다진 파슬리를 올려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이번에 파슬리를 사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마트에는 파슬리가 없었다. 대신 비슷하게 생긴 '파세리'가 있었는데, 실은 같은 재료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 사진에 있는 건 일단 파세리다.
남은 파세리는 유리컵에 줄기를 담가 보관하고 있다. 의외로 쓸 일이 없다. 미안해요, 전 세계의 파슬리 농부님들.
완성된 마늘 수프는 꽤 맛이 좋았다. 의외였다. 그저 치킨스톡이 대단한 것일 수도 있겠고. 짠맛이 조금 강했던 걸로 보아 치킨스톡을 쓸 때엔 물을 더 넣어도 좋겠다.
가자미 파피요트는 종이 포일에 재료를 차근차근 쌓고 그 포일을 사탕 포장처럼 돌돌 말아 오븐에 구워 조리한다. 보통 바닥에는 감자와 양파 등을 깔고 그 위에 생선을 얹은 다음 또 그 위에 레몬과 토마토, 허브 따위를 넣는 모양이다.
오븐을 예열하기 싫어 에어 프라이기를 썼는데 결과적으로는 오븐을 예열해서 쓰는 것보다 시간을 훨씬 더 많이 들였다. 바닥에 기름이 떨어질까 걱정되어 종이 포일을 두 장 썼는데 그러고도 위를 덮지 않았다.
윗면이 드러나 조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무엇보다 가자미 살이 제대로 익질 않았다. 욕심을 내 재료를 많이 손질한 탓에 가자미가 위층, 아래층으로 나뉘었고 익은 정도가 제각각인 총체적 난국이 되었다.
결국 4차 원정까지 끝낸 뒤에야 완성.
그냥 구워 먹어도 맛있는 재료들이기에 완성된 파피요트는 맛이 좋았다. 물론 간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워낙에 채소가 많이 들어가니 따로 생선 간을 할 때 과감하게 해도 좋겠다.
느낀 바가 또 있다. 오븐을 쓸 수 있으면 그냥 오븐을 쓰자. 그리고 레몬즙이 상처에 튀면 굉장히 괴롭다.
다음으로 안심 스테이크를 굽는다. 언제나 목표는 미디엄 레어. 그리고 결과는 언제나 미디엄이나 미디엄 웰던이다.
이 정도가 되니 슬슬 지치고 힘들어 과정은 사진으로 찍지 않게 된다.
스테이크를 다 먹고 나니, 가니시를 고려해 샀던 아스파라거스를 쓰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가자미 파피요트를 먹으면서 고기 간을 더욱 한 탓인지 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질겼다. 차라리 육회에 도전하는 기분으로 겉만 바싹 익혀야 할까.
마지막 디저트로 인절미 가루가 포함된 호떡(믹스)을 만들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투게더)을 얹는다.
앞선 요리에 비해 가장 정성이 덜 들어갔다. 그러나 전문가의 손길과 고민으로 개발된 때문인지 코스 가운데 제일 맛이 좋았다.
프랑스에서는 코스로 요리를 즐기면서 대화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주변에 프랑스인이 있지도 않고, 직접 프랑스에 가 식사도 한 일은 없다. 그러나 이번에 생각하기로는, 조리 시간이 길어서 대화가 많아지는 것 아닌가... 싶다.
어찌어찌 자칭 프랑스식 코스 요리를 마쳤다. 나중에 쁘띠 프랑스라도 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