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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권조 Apr 20. 2024

부산 가는 길 : 2일 차

성남 ▶ 용인

2일 차 아침, 숙소에서 계획을 얘기하는 27초가량의 영상을  발견했다. 영상을 삭제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녹취록을 작성했다.


"네, 이제 2일 차 아침입니다. 원래는 이천을 거쳐서 충주로 가려고, 이천을 조금 지나서 음성까지 가려고 했는데 최단거리는 아니지만 남쪽을 돌아서 용인을 거쳐서 충주 쪽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길이 좀 험하고 도보로는 갈 수 없는 곳이 좀 많은 것 같아서요. 원래 계획대로 성남은 시청까지 가서 지도를 얻고 2일 차 다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브이로그를 하고 싶었던 걸까? 여하간 도보 여행을 다니며 관공서와 기차역은 지도를 얻을 수 있는 장소라고 인식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브이로그 데뷔 영상으로부터 3시간 정도 후에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물음표 라이언은 힌트를 의미합니다.

지나던 길에 조형물이 신기하여 촬영한 듯하다. 사진을 확대해도 안내판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 그나마 조형물 위로 살짝 보이는 치과 이름이 있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미래의 나에게 긴장감을 주고자 조금씩 단서를 남겨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


1일 차 저녁을 먹은 장소에서부터 조형물 사이에 성남 시청이 있었다. 건물 외벽에 노란 리본이 담긴 벽보를 보고 잠시 발이 멈추었던 기억이 난다. 달력을 되짚어 보니, 토요일이었는데 과연 청사에 들어갔었는지 또 지도를 구했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분당을 지나며 기억에 남는 광경이 있다. 반듯하고 폭이 넉넉한 보도를 걷는 중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아파트 단지가 전부였는데 작은 편의점 하나 없이 세상 끝까지 아파트가 늘어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학원 차량이 차도 가장자리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앞뒤로 바짝 붙은 차량에는 타 있는 사람도 없었고 타려는 사람도 없었다. 운전기사로 추정되는 몇 명이 근처에 모여 담배를 피울 뿐으로 기억한다.


내가 지나는 이 공간이 어떻게 기능하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파트에서 학생 수백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학원가로 이동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 머릿속 장면은 흐릿하지만, 당시 느꼈던 이질감은 아직도 뚜렷하다.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점들을 지도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정리를 모두 마친 다음에 선을 이으면 대강의 경로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등장한 의문의 사진.

위치보다도, 무슨 맛이었을까 궁금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길에 버려진 음식물을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먹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던 것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간신히 유혹을 이겨내고 도시를 벗어났다.

사진을 기울여 찍은 게 아니라, 길이 기울었던 것 같다

차량 특히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보면 지역과 지역 사이의 공간을 로딩 화면 정도로만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걸음걸음마다 주변을 살피면, 산과 강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진다. 단순히 자연의 위대함, 인간의 미약함 따위를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지리, 건축 어디에도 조예는 없으나 산에 가로막힌 자리는 결국 지역과 지역을 나눈다. 나뉜 자리에는 서로를 잇기 위한 도로가 놓이고, 그 근처로 도로망을 활용하기 위한 구조물이 들어선다. 그래서인지 전국 각지로 물류를 운송해야 하는 공장 또는 물류센터를 자주 만난다.


건물을 세울 수 없는 강줄기는 오히려 지역 안을 관통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 단위에서 산이 장애물에 가깝다면, 강은 일종의 천연 도로이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지역과 지역 경계에는 최소한의 기반 시설만 있어, 걷기 어려운 환경이 자주 등장한다.

그나마 차도와 구분은 되어 있다.

아침부터 종일 걸어, 지친 상태였기에 다리를 크게 들거나 허리를 구부려 걷는 일조차 쉽지 않게 느껴진다.


오후 7시를 조금 넘긴 때가 되어 용인 시청을 발견했다.

토요일 저녁에도 근무하는 용산시청

뒤이어 용인대 입구를 지나며, 2일 차가 마무리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무얼 먹었는지 사진이나 영상이 없다. 출금이나 결제 내역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리 없다. 음, 그럴 리 없다.

달리는 차를 느긋하게 찍을 수 있다는 건 비교적 안전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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