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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경 Dec 02. 2022

가을걷이

캐디와 계절

가을은 바람이 데리고 온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바람이 열렬했던 우리의 여름을 아침저녁으로 삭히기 시작하면 우리 마음에도 찰랑찰랑 나뭇잎이 뜬다.

그 바람은 어느새 스스로 가벼워진 나뭇잎들을 분분히 군다.

 낙엽은  푸르던 시절을 켜켜이 간직하며 으로 돌아가 마지막 소임을 다한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 회화교재에 등장하는  문장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당신은 어느 계절을 좋아하나요?"

"나는 OO을 좋아합니다. 당신은요?"

일본어를 배울 때도 중국어를 공부할 때도 그랬다.

그 당시 수업 시간에는 정작 내가 좋아하는 계절을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열정적이고 집요했던 원어민 강사님은 분명 그 계절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해당 외국어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찾다 보니 마음과는 다른,  답을 위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딱히 내가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 내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지금 아무런 부담 없이 내게 묻는다면, 지금은 가을이라 답하련다.


그럼 1년 중에 캐디에게 제일 좋은 계절은 언제일까?

분명 저마다의 대답은 다 다를 것이다.

사무실이나 옥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계절이 가는 것을 못 느낀다는  안타까움을 쏟아지만, 캐디는 하루하루 눈으로 냄새로 몸으로  계절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느낀다.

캐디에게, 이 계절만큼 빛의  존재가  간절할 때가 또 있을까?

빛의 주체인 태양의 출몰은 우리의 일 시작과 끝을 알리는 하루의 알람이 된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절기에 짧은 해를 부여잡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골프라는 경기를 만끽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매일 일출시간과 일몰시간이 공지사항으로 올라온다.

그 시각마저도 그날의 기상상황에 따라 달라지므로 실제 해의 기운을 받기 시작하는 시각은 다르다.

그러니 (分)단위를 다툴 수밖에 없다. 

파 4홀인 경우 10분에서 12분, 파 3홀인 경우 10분, 파 5홀인 경우 15분을 적정 진행시간으로 잡는다.

우리 회사인 경우 코스의 난이도가 대체로 높은 코스이므로 이보다 더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 계절은 볼을 찾는 것도  날아가는 볼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

여름엔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뒷 배경이 되어 볼의 식별이 편한 반면, 이 시기가 되면 나무들의 빛깔이 누렇게 변해 볼을 돋보이게 하지 못한다. 어느 시의 시구처럼  별이 반짝거릴 수 있는 건 까만 밤하늘이 있기 때문이란 걸 불현듯 필드에서 느끼곤 한다.

특히 아침에 빛을 정면으로 보고 갈 때는 눈이 부셔 볼을 보기도 어렵다. 낙하한 볼들도 빛에 반사되어 이슬인지 볼인지 분간이 어렵다. 때론 볼이 낙엽 망토를 두르고 있어 사람과 숨바꼭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고객들이 볼을 칠 때마다 캐디간절해지고 집중할 수밖에 없다.

'제발 잘 맞아라!' 내 텔레파시가 볼에 닿기도 전,

경기자의 호흡을 깨뜨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동반자들이 있다.

실없는 농담으로 집중의 흐름을 끊어버리면 십중팔구 볼은 제대로 맞지 않는다.

재미를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러면 다시 그 사람 핑계를 대며 없던 걸로 하고 다시 치겠다고 한다.

 경기자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캐디 입장에선 경기 진행 시간의 압박으로 마냥 하고자 하는 대로 놔둘 수 없다.

그것을 저지하면 오히려 캐디를 야속해한다. 원망의 대상이 순식간에 나에게로 뀐다.

지금 이 상황이 나 때문이냐고 반박하고 싶지만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어리지도 않은 어른들을 얼래고 달래야 한다.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지만 어쨌든 상황을 이끌어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볼의 향방에 따라 추임새를 는다.

벙커 넘어라.. 좀 더! 좀 더!

페널티 구역으로 볼이 날아가고 있거나 세차게 굴러가고 있을 때에는

"안 돼. 제발 멈춰. 스토~오옵!"

"오른으로 돌아. 죽~쭉.. 뻗어!"

마치 축구경기의  해설자처럼 나의 눈과 입은 5cm도 안 되는 작은 골프공에 오르락내리락한다.

차라리 속으로 꽁하고 있는 것보다 그렇게 말이라도 하면서  밖으로 발산해야  것 같다.

이 또한 고객들을 향한 응원이니 고객들도 함께 가세한다.

이와는  반대고객들도 많다.

진행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정신없이 플레이를 하면 오히려 내가 진정시키며 진행시키는 경우도 있다.

대개가 육지에서 단련된 행동이다.

진행에 많이 기거나 캐디들로부터 압박을 받았던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이 자연스레 몸에 녹아있어 캐디인 나보다 더 진행에 신경을 쓴다.

고마운 분들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코스의 진행상황이 원활하다면 나는 그들에게 풍경도 즐기면서 천천히 경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고작 그런 정도이다.

 또한 캐디인 나와 뒷팀을 배려한 마음일 테니...

그리고 이런 부류들도 있다.

이곳이 제주라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이 제주까지 와서 골프를 치는데 쫓기며 쳐야 하냐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좀 여유롭게 즐기면서 치려고 온 것이라고 한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와서 그런지 이곳을 동남아 어디 섬나라쯤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제주도 엄연한  대한민국의 관할 행정구역이다.

특별자치도라 특별하게 다른 룰을 적용하는 것인지 아는 것인가!

우스갯소리이지만 현장에선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다.

 정상적인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을 촉하 않는다. 분명 늦는 팀은 그 이유가 있다.

SNS용 사진을 찍거나 유튜브 실시간 방송을 하겠다며 마이크와 삼각대까지 준비하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기념사진 몇 장 정도는 몰라도 매번 홀마다 사진 촬영을 하는 제지당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이는 엄연히 규제대상이다.

골프장 코스는 저작권법상 저작물에 해당하므로 이를 촬영하여 사적으로 이익을 편취하는 것은 위법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상은 미디어가 발전하고 개인방송들이 많다 보니 골프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골프룰이나 매너보다는 기술을 먼저 익히고 그것에만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골프는 스코어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니 결과가 중요하다.

산뜻하지 않은 과정 없이 이루어낸 결과가 마냥 좋을까?

연세 지긋한 분들은 말한다.

"우리 때는 들고 뛰는 것부터 배웠어."

아니 볼을 치라고 있는 건데, 왜 들고뛰어요?"

라고 묻는 사람들, 그냥 웃고 만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가 간다면  권리는 정당한 것인가?

고객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아직 일 성근 신입들이나, 착한 캐디들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고객들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어 혼자 전전긍긍하는 캐디들, 나 또한 이 점에 자유로울 수 없다.

최대한 완곡한 표현과 행동을 고민하지만 늘 어렵다.

고객들에겐 착한 캐디일 줄 몰라도 회사나 동료들에겐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혼자 마음과 몸이 바쁜 사람, 친절은 과연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1라운드를 마치고 2라운드를 위해서 근무 준비를 할 시간은 몇십 분이 남지 않는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고  점심식사는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경기팀과 대기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마친 팀의 골프백들을 챙기는 사람, 새로운 골프백들을 는 사람, 상차를 할 골프백을 찾는 사람들, 티업 시간에 늦는 팀들의 골프백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로 뒤엉켜있다.

사무실의 내근직 직원들이 헬퍼로 등장한다.

모자 손을 보탠다.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이미 광장에선 고객들이 미리 나와서 캐디와 골프카를 기다린다.

미안한 마음으로 그들과 만난다.

기다리게 하는 것도 , 정신없이 근무 준비를 하고 나가서 그들을 맞는 것도...

그들도 똑같이 값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우리 회사를 찾아  준 고객들인데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실상은 어수선한 상태에서 그들을 맞아야 하는 마음이 때론 불편하다.

그리고 그날 캐디가 2라운드라는 것을 아는 분들은 오히려 캐디들이 힘들 거라고 생각하여 클럽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냥 대충 치는 경우도 있다.

그럼 그들에게 말한다.

"고객님, 클럽 바꿔달라고 말씀하세요. 그냥 치지 마시고..."

"캐디님들도 힘드실 텐데요. 괜찮아요."

"아니에요. 제가 할 일인데요. 개념치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몸이 불편한 게 나아요. "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일, 그것이 사람을 향하는 일이다.

그런 마음들이 보이는 사람들과의 플레이는 2라운드라 하더라도 힘들지 않다.

아무리 진행이 느린 사람들도 오후 4시가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행동이 빨라진다.

 기운이 희미해져 가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칫하다 18홀을 빛 아래에서 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면 그때부턴 스스로 빨라지기 시작한다.

캐디가 진행을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면 조명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도 그냥 플레이를 계속하는 팀들도 있고, 경기를 접고 귀환하는 팀들도 있다.

이전 글에도 쓴 바 있듯이, 캐디가 신이 되는 순간들이 펼쳐진다.

둠 속에서도 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없는 반딧불이라도 잡아서 눈에 불을 밝힐 기세다.

그린 위에서도 경사도를 살펴 알려 주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경사가 보이기 만무한다.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에 의지하여 대략적인 방향만 알려줄 뿐이다.

이 시절은 캐디에게 하루가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진다.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어 살아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해가 부쩍 짧아진 만큼, 하루는 짧고 강렬하다.


삶이 유한다는 것을 알기에 이 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처럼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왠지 빨리 저무는 태양빛 따라 열심히 부산 떠는 이 시간들의 쓰임이 노을빛만큼이나 붉다.

길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 소중하고 알뜰하게 그래서 충만할 수 있는 삶의 주인이 되어 보는 지혜를 이 계절에 배운다.


 마지막 홀 티잉그라운드... 얼마 남지 않는 태양의 기운이 하늘가를 물들이며 사력을 다한다.

어느 바람에 실려온 노랑,빨강의 낙엽들을 주섬주섬 하나씩 포개며 줍는다.

2022년의 가을을 오롯이 담아놓은 그것들을 근무수첩 속에 펴서  묻어 놓았다.


나의 가을은 그렇게 물들어 가고,

나의 가을걷이는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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