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재수 vs 재수 고민(Feat. 딸의 선택)

by 청블리쌤

<딸의 선택>

딸은 쌩재수를 선택했다. 집안 어른들은 난리였다. 서울대 갈 거 아니면 경북대도 괜찮으니 그냥 가는 게 어떻겠냐고 딸에게 직접 문자를 보내셨다고 한다. 그 말씀에 자칫 힘이라도 더 실릴까 봐 차마 성적우수장학금 대상자가 되었다는 말씀은 드리지도 못했다.

경북대 갈 성적이 안 나왔다면 미련 없이 지지했겠지만, 안정적인 길을 놔두고 재수해서 성적이 더 잘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모험을 하는 건 불안하신 거다. 게다가 집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더 안정적인 선택일 것이니...




<현시대의 지거국 대학 선택>

지거국의 위상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유야 어떻든 지거국과 비슷한 성적이라도 네임밸류가 덜 한 인서울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건 시대의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선택은 학생들의 기질과 선호도에 따라 다르긴 하다.

역량은 되지만, 한 번 더 수능을 겪고 싶지 않은 데다가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인서울 러쉬가 시작되기 전, 집안 형편이 안 좋음에도 무조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결국 인서울 했던 제자들도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비교육특구이긴 했지만 고3 담임할 때만 해도 서울대를 제외하고는 인서울 대학 진학이 드물었다. 최상위권이 진학하는 의대나 교대, 사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학생들의 목표가 경북대였다. 그 당시에는 의대에 견줄 수는 없었지만 지역의 교대와 사대는 최상위권의 선호 대학이었다.




<쌩재수와 반수 사이에 고민하는 제자들>

이번에 입시를 치른 직전 학교 제자들 몇 명과 연락이 되었다.

수시 6개 카드 중에 6순위에 걸린 제자들은 반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물론 정시 반수에 비해 수시 반수는 재수생 지원을 제한하는 대학의 변수는 있지만 수능 최저를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더 적다.

인서울 대학이니 아쉬움을 안고라도 일단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후 기회를 보겠다는 제자도 막상 등록을 하고 서울 올라가려고 하니 망설이고 있었다.

다른 제자는 재수를 굳히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반수를 결정했다고 했다.

난 이과인 두 제자들에게 대학보다 전공선택이 옳았던 것인지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고민 중인 학생들은 주변의 한두 마디에도 흔들리게 되어 있다. 굳은 의지로 시작한다고 해서 불안한 요소까지 면제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능 직전 모의고사에서 최고점을 받고 재수학원에서 장학금까지 받아 의대가 확실시되었던 제자는 수능을 망치고 삼수의 길을 가기도 했다. 물론 삼수, 사수로 의대를 결국 진학한 제자들도 더러 있었다. 정말 눈물겨운 인간승리였다.




<반수의 장단점>

반수는 타협이고 양다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걸쳐 놓는 대학이 재수나 반수를 해서도 그다지 손해 보는 대학이 아니고 큰 불만이 없다면 거의 그 대학을 다니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저 한 번의 기회를 더 갖는 것일 수 있다. 절실함이 부족하다면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한 제스처로 그치지 않도록 순간순간 절실함을 일깨우는 다짐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걸쳐 놓았을 때 좋은 점은, 망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심리적 안정 외에도 수시나 정시지원에 카드 하나가 더 추가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시의 경우 3번 지원에 추가로 한 장 더 원서를 써놓은 효과가 있는 것이고, 그것도 무조건 합격인 카드이기 때문에 다른 카드는 소신껏 높여 쓸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그러나 재수비용 외에도 추가비용이 더 든다는 단점을 무시할 수 없다.

학고반수(최소학점만 남겨놓고 출석하지 않고 F를 받는 반수)의 경우는 그저 등록금만 날리는 것이지만, 대학생활을 하면서 반수를 할 때는 학점과 수능을 둘 다 잡을 수 없는 상황과, 학과 친구 관계 형성의 애매함을 극복하기 어렵다. 다시 돌아왔을 경우 신입생의 낭만과 학점과 동기들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희생시킨 애매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1학년 성적으로 전공을 결정하는 계열모집의 경우는 반수에 더 신중해야 한다.


학고반수의 경우 날린 학점에 재이수 규정이 적용되어 B+이상의 등급을 받을 수 없는 제한이 있을 수도 있고, 2학기 휴학을 하고 돌아왔을 때 동기들이 선배가 되어 있을 수 있다.

보통 대학마다 병휴학이나 군입대휴학을 제외하고는 1학기 휴학을 금지한다. 반수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그리고 인서울 대학 중 홍대, 서울시립대, 숙명여대, 숭실대, 세종대, 국민대 등은 2학기까지도 휴학이 안 되니 무휴학반수 외에 방법이 없다.


대개 정시 기준으로 국영수 성적이 안정적인데 탐구과목에서 아쉬운 성적을 받은 경우처럼 수능의 최고레벨에 어느 정도 도달했다면 학고반수를 하지 않고도 반수가 가능하다. 이미 개념이 완성된 학생들이기 때문에 1학기 종료 후 문풀(문제풀이) 위주로도 최고 레벨을 회복할 여지가 있으므로 실제로 성균관대에서는 2학기부터 잠수타는 학생들이 급증한다고 한다.




<쌩재수의 장단점>

쌩재수는 시작부터 불안함을 안게 된다. 특히 어느 정도 레벨의 대학에 합격했지만, 그 이상을 노리고 반수가 아닌 쌩재수를 선택했을 경우에는 슬럼프가 올 때마다 후회마저 추가될 수도 있다. 반수가 아닌 쌩재수는 '배수의 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때로 당장의 현실과 괴리가 생길 때, 그러니까 모의고사 점수가 안 나오거나, 슬럼프를 마주할 때엔 오히려 넘치는 간절함으로 인해 더 감당하기 어려운 의심, 조급함, 불안함 등과도 싸워야 한다.


적어도 아침에 몸을 일으켜서 움직이여야 하는 반수생과 현역 고3과 비교하면, 쌩재수는 매일이 방학 같은 일상이다. 명분 없이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몸을 일으키고, 힘을 내고, 수업을 찾아 듣고, 자습을 해야 한다. 자기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걸 주변의 친구들의 공감으로 위로를 받을 수도 없다. 큰 비용을 들여서 그런 환경을 억지로 만들지 않으면 늘 홀로일 수밖에 없는 거다. 게다가 친구들도 재수하는 친구에게 연락하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별로 수업을 들을 생각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재수학원을 선택하고, 학교 같은 관리를 해주는 독학재수학원을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보다 더한 환경을 원할 경우(학생보다 부모님의 영향이 더 크겠지만) 기숙학원에 가기도 한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의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그냥 폐인처럼 지낼 수도 있는 위험이 늘 존재하기 때문에 늦잠을 자거나, 규칙적인 생활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과도한 위기의식이 생겨 힘들어할 수도 있다.

평소 슬럼프가 올 때뿐 아니라 두 번 다시 실패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맞이하는 수능시험 자체에 대한 부담이 반수생보다 더 크다. 반수생은 망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심리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고, 현역 고3은 안 되면 재수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는 무모한 담대성이라도 있는데, 쌩재수는 돌아갈 곳도 없고, 이미 수능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막연한 낭만주의에 빠질 수도 없다기 때문이다.


재수나 반수를 하면 보통 같은 라인에 머물 가능성이 높고, 잘 되어 봐야 하나 정도 라인으로 올라설 정도일 뿐이라는 주변의 의지를 꺾는 통념과도 싸워야 한다. 통계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으나, 자신만의 역사를 쓰면 되는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특히 재수해서 정시원서를 쓸 때는 현역 고3이나 반수생만큼 대담할 수 없다는 것도 힘든 고민거리가 된다. 아예 안정권으로 낮춰 쓰지 않으면 배치표대로 꼭 결과가 나오지는 않으니 어디까지 욕심을 내도 될지가 확실치 않다는 불안요소도 있다. 쌩재수는 이 모든 걸 그냥 쌩으로 감당해야 한다. 한 번 이상 실패했다는 아픔을 여전히 가슴에 지닌 채로...

재수를 역량만으로 결정할 수 없고 주변 사람들이 대신 선택해 줄 수 없는 이유다.




<쌩재수 vs 반수 - 결론>

결론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쌩재수도 반수도 각각의 장단점과 유불리가 엇갈린다. 그 불안함과 변수를 끌어안고 공부를 하는 것은 본인이니, 결국 부모님이 개입하여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답은 본인만 알고 있다. 그런데도 본인은 그 답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니 고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우리 애도 기숙학원에 보내야 하나?>

독학재수학원에 인원이 넘쳐나고, 기숙학원에도 학생들이 몰린다.

주변에서 기숙학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에 아내가 딸에게 기숙학원 보내줄까 물었다.

그러나 난 차마 딸에게는 기숙학원을 보내줄 수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한 달에 300만 원 정도의 학원비에 부수비용까지 하면 400만 원이라고 하니 일반 사립대 한 한기 등록금 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동안 학원도 안 보내면서도 불안해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는데, 비용을 감당할 수도 없지만 이제 와서 중간 과정 없이 갑자기 기숙학원을 보내는 건 나의 교육관에도 맞지 않아 딸에게 미안하다고 하니까, 딸은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엄마가 얘기하길래 자기를 멀리 보내버리려 하는 줄 알았다고 하며 웃었다.

딸은 휴대폰관리 등 최소한의 관리만 해주는 거의 독서실 비용의 관리형독서실을 선택했다.




<재수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성장>

어른들은 경북대 갈 거 아니라도 걸쳐 놓을 것으로 타협안을 내려 했다.

물론 지금 성적보다 안 나올 수도 있고, 비슷하게 나올 수도 있으니 오히려 해서 손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리스크 없다면 얻는 것도 적다.

딸에게 위험 및 불안요소와 변수를 미안할 정도로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마치 재수나 반수를 말리는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겠느냐는 일종의 테스트라고 생각하고 난 현실을 가감 없이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혹 재수해서 원점에 돌아온 것처럼 경대를 가게 되더라도 실패는 아니라고도 말해주었다. 삶을 보는 시각과 태도가 성장했을 것이니.. 아픔과 고통의 시간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미래의 삶을 준비하고 극복하는 내공을 키웠을 것이니... 영어와 문해력 등 학업능력을 확실히 더 갖춰서 시작하게 될 것이니...


얼마 전 한 제자가 재수를 해서 목표 달성은 못했지만, 너무 행복하게 잘 지낸다는 말을 전했다. 힘든 재수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 못할 이유가 없고, 사소한 모든 것까지 다 감사하고 행복할 이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교만함을 다 내려놓고 겸손한 배움의 자세를 갖게 된 것도 소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난 광야의 훈련을 잘 이겨냈다고 축하해 주었다. 군대 갔다 오면 고등학교 때 받아들이지 않았던 영어학습코칭 받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재수의 철저한 자기 결정성>

재수의 과정은 부모의 욕심으로 시작의 문턱도 넘게 할 수 없다. 고3 과정을 겪었고 그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도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거다.

고3 담임할 때 아쉬운 마음으로 자녀가 재수를 할 수 있도록 설득해달라는 학부모님의 요구가 더러 있었지만 설득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반대로 재수하겠다고 마음먹은 아이를 주저앉도록 설득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우리가 성공이나 실패라는 이름으로 규정할 수 없다.

쉬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는 시행착오일 수도 있음을 존중해야 함을 느낀다.

휴학도 하지 않고 그저 빨리빨리 표준화된 정해진 길에서 속도만으로 승부했던 부모 세대와는 이미 많이 달라졌고, 앞으로 더 달라질 것이다.




<경북대에 등록한 이유>

그러면서 오늘 난 경북대에 등록해버렸다. 아쉬움을 담아 내가 대신 선택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등록이라도 해보아야 후회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아니고.. 행여 등록포기하는 기간에 딸이 마음을 돌이키기를 (솔직히는 바라지만)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년을 위한 준비를 나도 하고 싶어서였다.

일단 합격한 대학에 등록하고, 충원기간에 등록을 포기하고 추가 합격한 대학에 등록하는 등의 절차를 직접 해보아 할 것 같았다.

혹 며칠 사이에 딸의 심경의 변화가 있을 수 있어 등록상태로 좀 더 기다리겠지만, 누군가 추가합격할 길을 열어주어야 하니 마감일까지 기다리지는 않고 충원합격발표가 진행되는 중간에 결단을 할 생각이다.


딸이 재수를 확정지었지만 정시원서를 냈던 것도 쓸데없는 돈낭비가 아니라고 믿었다. 자신이 받은 성적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전략을 함께 고민하고 합격, 불합격 통지에 대해 반응하는 실제적인 경험이 재수해서 원서 쓸 때뿐 아니라 재수하는 과정에서도 현실적인 공부에 대한 동기유발의 요소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북대 발표는 본인이 먼저 확인하고 가족톡방에 소식을 전했다.




<딸의 선택을 존중하며 응원하는 마음>

솔직히 나와 아내는 딸과 오래도록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지금에라도 경북대에 남아주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니...

등록이라도 해두는 것이 심리적인 안정감에 도움이 되겠고, 물론 그건 딸 자신보다 부모의 정서적 안정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이겠지만... 등록포기를 하는 불안함의 몫을 굳이 부모가 지려하지 않고 딸 자신이 느끼는 무게로 남겨두는 훈련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딸은 좀 더 준비가 되어서 대학을 진학하겠지만, 부모인 우리도 딸을 대학 보내기 위해 좀 더 준비와 성장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고3 때보다는 나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줄이겠지만, 딸이 원할 때는 언제든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필요한 격려를 해주려 이미 대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한 딸에게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고, 스마트폰과의 전쟁에서 번번이 질 수도 있지만, 믿음을 가지고 정말 뿌듯한 마음으로 흐뭇하게 지켜보고 싶다. 부담 없는, 강압 없는 무언의 응원이 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주님의 궁극적인 뜻을 딸이 꿋꿋하게 잘 이뤄가길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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