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대박을 떠나서 수능장에서 웃으면서 나오는 딸의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딸은 울면서 수능장을 나왔습니다. 시험 망친 결과를 떠나서 딸의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멀리서부터 바라보는 저의 마음은 그 눈물로 얼룩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험장에 부모님이 나가지 말라는 경험자의 조언도 있는 거였습니다. 수험생 본인의 속상함으로 시작된 눈물은 부모님을 보면 미안함으로 더 짙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저 딸 옆에 있어줘야 했습니다. 속상한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딸은 마음 속의 멍울과 힘든 짐은 저와 함께 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능 전날 국어 독서 분야에 화학이나 물리분야(특히 물리)가 나오면 좋겠다고, 수능 선택하지 않은 생명과학만 아니면 좋겠다고, 사회분야는 경제만 아니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는데...
1교시 후 확인해보니 생명과학과 경제분야를 딸이 적중시켰던 걸 보고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려운 국어 영역을 대체로 늘 잘해왔기 때문에 믿음으로 불안함을 억눌렀습니다.
그런데도 집으로 들어오는 문소리가 나면 혹 딸이 시험장에서 뛰쳐 나왔는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남들처럼 계산하지 않고 나름 그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1-2분 만에 풀어 시간을 다른 학생보다 훨씬 시간을 절약해왔던 극한 문제가 너무 쉽게 나왔고 27번 문제는 계산값이 너무 지저분해서 확신없이 계속 풀다가 30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수학시간을 마쳤는데 같은 시험장에 있던 친구와 27번 답이 일치하지 않자 더 좌절을 하였다고 합니다.(그렇게 답을 맞춰보거나 맞춰보더라도 정답이 아닐 수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머리로 아는 것과는 달랐겠지요. 나중에 알고보니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답이 정답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쓸데없이 감정노동만 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좌절감에 점심도 못먹었다고...
4교시 과학탐구 시간에는 손까지 떨리더라고...
4교시 한국사 시험 후 10분간의 대기시간 중에 점심도 안 먹고 앉아 있는게 너무 힘들어서 감독관 선생님께 손을 들고 뭘 좀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허락을 받고 자신의 가방을 둔 교실 앞으로 가서 손에 잡히는 초코렛을 집어들었는데 그게 마침 크런키 초코렛이었고... 다른 걸 찾으려하니 부정행위로 오해받을 것 같아서 그냥 그 자리에서 먹었다고 합니다. 정적이 흐르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적우적 초코렛을 씹었던 거죠. 그걸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얼마나 힘겨운 순간을 지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짠합니다.
2교시 수학 마치고는 시험장에서 뛰쳐나오려고 하다가... 어차피 망해서 재수를 하더라도 겪어야 할 일이니 경험상이라도 끝까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마음을 비우니 그 일이 가능해지더라고...(수능장에서 뛰쳐 나오려고 했다는 말은 한참 후에야 들었습니다. 제가 정시 선언한 딸에게 내신시험의 효용가치를 떠나서 어떤 경우에도 시험에 대한 예의를 다하라고 계속 강조했었고, 딸도 그 말을 가슴 속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결과를 떠나서 힘겨운 마음의 고통속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딸이 자랑스럽고 그렇게 성장한 딸이 대견했습니다)
그러고 수능장을 나섰으니 눈물이 안 나올 수 없었겠지요. 지방거점국립대학(일명 '지거국')을 무시했었는데 그 대학도 못가겠다면서 좌절하면서... 저녁까지 안 먹으려 하였습니다.
둘째 딸과 아내와 저 온 가족이 수능장 앞에서 기다리다가 딸을 맞이했는데... 딸이 우는 것을 보고도 아내는 딸의 고생과 애씀이 안쓰러워 괜찮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중3인 둘째 딸은 언니 재수해야되냐고 물었습니다. 그 상황에 그 엄마의 위로도, 동생의 현실적인 대안도 큰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딸 옆에서 함께 걸으며 실컷 울어서 눈물이 마를 때까지, 그리고 입을 열어 상황을 말해줄 때까지 그저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딸이 위의 이야기를 쭉 하는 거였습니다
딸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제가 이랬습니다.
수능 폭망이 확정되기까지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한다.
첫째 가채점을 해보고 자신의 점수가 정말 평소보다 많이 낮은지 객관적으로 확인이 된 후에야
둘째 등급컷을 확인해보고 컷은 올랐는데 자신만 성적이 떨어졌다면, 그렇게 두 가지가 다 확인이 되면 망한 것 맞으니 그 때 가서 폭망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책을 세우면 된다.
그리고 겨우 아이를 진정시켜 집에 데려왔지요.
그리고 두 가지 과정을 거치고 나서 제 감으로 얘기해주었습니다. 못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경북대 공대는 무조건 간다... 성대나 한양대까지는 힘들겠지만...
이 말을 듣고 딸은 겨우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기운이 나고 정신이 들고 기분이 나아졌는지 저에게 다가와서 미인대회 인사하듯 이러는 겁니다.
"안녕하세요. 경북대 공대 여신 OOO입니다!"
순간 전 빵 터지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인서울을 할 수는 있지만 원하는 곳을 진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지방에 남을 것에 대한 아쉬움, 그렇다고 재수라는 과정으로 똑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 교사할 생각이 전혀 없다가 주변의 권유대로 뜬금없이 교대나 사대에 진학할 마음은 전혀 없는 여러 가지 심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너는 서울대 갈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서울대를 감당할만한 공부에 대한 끈기와 치열한 노력의 자세를 갖추지는 않았다. 성균관대나 한양대도 갈 뻔했지만 그럴 수 없던 것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노력과 성실함의 부족 때문이다. 운이 더 좋아서라도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상상이지만, 그 대학이 너의 일상과 현실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양대 이상의 공대는 기본적으로 영재고나 과학고 출신들의 학생들이 혼재해 있다. 네가 그들보다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공부에만 집중하며 살 생각이 없는 너의 자세로는 그들의 준비도를 넘어서서 비슷하게 경쟁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입학으로 모든 것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이과계열에서도 학점관리가 취업에도 중요한 요소가 되니 입학 후의 경쟁력도 무시할 수 없잖니.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현실적인 옵션이 아니기도 하니...
네가 여유를 즐기면서 고3생활을 재미있게 했다면 대학생활도 그래야 한다. 아빤 그렇게 네가 계속 행복을 이어가길 바라기 때문이지.
막상 재수를 망설이게 되는 것도 그 힘든 과정을 반복하기 싫어하는 너의 솔직한 반응임을 인정하렴. 2-3문제만 더 맞혔어도 성균관대 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상위권 대학은 원래 한 두 문제로 대학과 학과와 재수가 결정된다. 특히 의대는 한 문제 차이로 1년이나 2년을 더 공부해서 의대갈 것이 강요되기도 한다.
너의 순간순간의 선택을 존중한 것은 너의 능력에는 맞지만 치열하게 노력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곳에 억지로 처해있도록 강요하고 싶지 않은 아빠의 내려놓음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당장 서울의 좋은 대학을 입학하게 되면 우쭐하고 당장은 보상받은 기분이겠지만, 그래서 서울에서의 삶이 너무 기대되고 흥분되겠지만 그곳도 너의 일상이 되면 너는 너의 기질상 금방 질리게 될 거란다. 더 이상 새로운 게 나올 게 없을 정도로 넌 모험을 해볼 것이니... 사실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이 지방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서울에서 노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서울로 가려는 것도 있는 거잖니.
오히려 지방에 남아서 한 번씩 서울에 놀러가거나, 이과는 그런 사례가 드물긴 하지만 해외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갈 기회를 잡거나 하면서 다양하고 재미 있는 삶을 추구해보렴.
어차피 공대의 학업량은 그렇게 많은 여가 활동을 보장해주는 곳이 아니니..
그리고 경북대 공대의 경쟁력은 서울 못지 않다는 거 알고 있잖니. 경쟁력이 서울 못지 않다는 건 그만큼 공부를 많이 시킨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니 대학생활이 그저 노는 곳이라는 생각은 버리렴. 그래도 '서연고서성한'보다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그곳에서 너의 소질과 진로를 더 깊이 탐색해보고 정말 원하는 길을 찾게 되면 뜯어 말려도 대학원을 더 도전적으로 진학할 수도 있고, 다른 진로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니...
대학 다니면서 반수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게 더 현실적이고 의미있을 것 같구나.
그래도 네가 전공을 정해놓고 한 곳만 바라보는 건 흐뭇하구나. 학과를 타협해서 더 좋은 대학을 진학하려는 끝없는 고민을 덜어준 것도 좋고...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고 있는 지금... 아빠 얘기대로 수능 끝나면 노는 것도 재미가 없지? 실컷 해보라고 할 때는 원래 스릴이 없어 재미가 없는 거란다. 그러니 도저히 지금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다양한 분야의 공부나 독서를 해보는 것이 더 재미 있을 것 같지 않니? 고3 때 공부 안하는 과정에서 극단의 즐거움을 얻었던 그 체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