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전날 수능 준비물을 챙기러 나갔다가 마주친 4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에게 딸이 이럽니다.
“너도 수능을 치겠지?”
딸의 모든 삶의 중심은 수능시험이었던 것입니다. 별별 상상을 다합니다. 수능시험 때 실수하는 것, 시험장에 가는 택시가 사고가 나는 것...
그러고 보니 시험이 다가오면서 딸이 예민해지고 감성적이 된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열흘 전 불안해하는 마음을 달래주려고 써줬던 편지를 학교 가는 길에 읽으면서 눈물이 나서 눈을 가리고 교실 문을 들어섰다고 하며, 서원식 때 선생님들의 응원 영상을 보면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래로 가장 감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딸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수능만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
감성뿐 아니라 예민함으로 인해 걱정도 사서 합니다. 혼자서 풀어본 화학 모의고사에서 5등급을 맞아놓고는 이제 다 끝났다고 자포자기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옆의 친구가 맛있는 것 사주면서 격려하고, 어떤 친구는 하루에 한 등급씩 오를 거라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루에 한 등급씩 오른다며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신기해하며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힘내라는 격려와 위로가 큰 시험을 앞둔 그들에게는 사소하고 공허한 인사치레 말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듯한 위로와 격려의 말은 아껴둘 게 아닌 거였습니다.
웃음도 부쩍 많아졌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배꼽 잡으며 웃어댑니다. 순간 웃음으로 현실을 묻어버리는 노력을 하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시험 직전 야자 없이 집에서 컨디션 조절하는 딸과 큰 시험이라는 의식이 안 되게 더 많이 웃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웃다가 걱정하다가 별 상상을 다하는 딸의 찡찡거림을 그대로 들어주었죠.
시험 시즌이 되니 주변의 분들이 많은 격려의 마음을 실물로 표현해주셨습니다. 예전에는 찹쌀떡과 엿이 대세였는데 요즈음에는 시험 중간에 당을 보충할 수 있는 초콜릿이 대세라는 흐름을, 받은 선물들을 한곳에 쌓아놓으며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잘 살았다는 생각보다 주변에 참 좋으신 분들이 많다는 생각에 감사했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격려 선물을 자꾸 받아오니까 아들이 그만 좀 받아오라고 공부도 열심히 안 했는데 부담된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제 딸은 그렇게 열심히 한 것 같지도 않은데도 받은 것마다 신기해하면서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고는 하나씩 맛을 보고 그랬던 모습이 참 기뻤습니다.
선물을 받을 때 자신의 자격 여부를 따지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멘탈이 대견했습니다.
딸은 끊임없이 자꾸 상상을 하였습니다. 재수하면 더 잘할 것 같다면서... 그리고 시간이 한 달만 더 있었다면 더 성적을 올릴 자신이 있다고...
제가 많이 속아 봤던 멘트이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혹 재수를 시작해서 시험을 2주 앞두면 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라고...
재수를 한다고 해서 마음먹은 순간부터 쉬지 않고 공부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고, 그런 기질하고는 특히 거리가 먼 딸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바로 공감을 했지요.
시험이 다가오면서 자신은 긴장이 별로 안 되고 불안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하길래, 너의 편안함이 부모의 불안함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는 살짝 후회했습니다. 따지듯이 한 말은 아니었고 같이 웃어넘기긴 했지만 자칫 끝까지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것에 대한 책망으로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수험생 부모의 숙명입니다. 아이들보다 더 욕심을 내면서 아이를 판단하는 것은 말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 숙명을 거스르는 사명도 함께 주어진듯합니다.
보통은 수능이 다가올수록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워야 한다고 말해주는데 저는 딸에게 욕심을 좀 내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선택도 본인의 것이어야 하고 선택을 강요하는 순간 아이는 불안함이 더 커질 것이니까요.
건강은 괜찮을지, 밤에 잠은 잘 자고 시험장에 갈 수 있을지, 수능 문제는 적성에 맞을지, 시험장에 이상하게 방해하는 학생은 없을지, 감독교사가 신경 쓰게 하는 일은 없을지... 걱정이 시작되면 무한대의 변수에 대한 상상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그냥 생각 자체를 안 하는게 낫겠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잊고 기다리는 것이지요. 많은 부모님들이 그런 마음과 정성을 모아 예전에는 교문에 엿을 붙이는 일도 흔했고, 지금도 절이나 교회에서 아이들 시험치는 시간에 맞춰 기도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딸에게 선언했습니다. 넌 너의 주어진 길을 최선을 다해 가는 동안 아빠는 편안하게 놀고 있겠다고... 그러니 행여 미안한 마음 같은 거 가질 필요 없다고.
시험인 오늘 아침 집사람과 함께 딸을 시험장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 4년간 근무했던 학교에서 시험을 치게 된 건 딸이 아닌 제게만 약간의 심리적 안정감과 편안함을 줄 뿐이었네요.
시험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딸의 뒷모습에 눈물이 솟아나는 걸 느꼈습니다. 첫 초등학교 등교할 때 교문에서 발걸음을 옮기던 그 작고 귀여운 아이와 동일한 아이임이 실감 나지 않는 세월의 긴 간극이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무사히 그 자리에, 남들과 비교해서는 노력이 부족했을지 모르고, 학원을 다니면서 힘겹게 실력을 연마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다 달려와서 그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그 느낌 자체가 가슴 벅차고 웅장하고 엄숙하게까지 느껴졌습니다.
아침에 딸의 가방에 이렇게 간단하게 편지를 써서 넣어주었습니다.
드디어 그 순간이 왔구나.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다.
걱정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많은 생각하지 말고 그저 매 순간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렴. 시험이 시작되면 결국 온전히 다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니 매 순간을 그저 즐기길...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매 순간에 공부했던 모든 것이 다 기억나고, 단 한 가지의 후회도 남기지 않기를 기도할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마치는 시간에 웃으면서 다가오는 딸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모든 수험생들이 후회나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 모습을 함께 응원합니다.
수험생 딸로 인해 올해 수능 감독은 빠졌는데.. 정말 몸과 마음으로 큰 고생을 하시는 모든 수능 감독 선생님들도 무사히 뿌듯한 일정을 잘 마치시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