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 강과 단테 신곡 사이 어디쯤
커피 마시며 단테 — Coffee with Dante
# 9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자들과, 그것을 기록한 시인
이쪽과 저쪽. 돌아갈 수 있는 것과 돌아갈 수 없는 것. 강을 건너기 전의 나와, 건넌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강은 그 사이에 있다.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결정이 흐르는 것이다.
루비콘강.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강. 폭이 넓지 않다. 깊지도 않다. 그러나 그 강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무거운 강이 되었다. 기원전 49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 강을 건넜다. 법을 어기고. 로마를 향해.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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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법은 명확했다. 어떤 장군도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서는 안 된다. 그 강 너머는 로마의 영토였고, 무장한 군대가 로마 영토에 들어오는 것은 반역이었다. 카이사르는 그것을 알았다. 갈리아에서 10년을 싸웠다. 수백만 명을 정복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그런데 원로원이 명령했다. 군대를 해산하고 혼자 돌아오라고.
강을 건너면 내전이다. 건너지 않으면 죽음이다.
수에토니우스는 기록했다. 카이사르가 강가에서 잠시 멈추었다고. 망설였다고. 그리고 말했다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 수에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생애》
그 한마디.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의 선언. 강을 건넌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의 선언. 카이사르는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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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루비콘강을 직접 소환하는 것은 천국편 6곡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역사를 노래한다. 독수리 — 로마의 상징 — 가 어떻게 세상을 날아다녔는지를. 그 긴 역사의 노래 속에서 카이사르가 등장한다. 그리고 루비콘강이 언급된다.
단테에게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섭리의 일부였다. 로마 제국이 세상을 통일하고, 그 제국 아래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그 제국의 법 아래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진 것 — 그 모든 것이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에서 시작되었다.
단테는 카이사르의 반역을 섭리로 읽었다.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더 큰 법을 따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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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는 카이사르를 지옥에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지옥편 4곡, 림보에 있다. 세례를 받지 못한 위대한 자들의 곳. 고통은 없지만 신의 빛도 없는 곳.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그러나 카이사르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코치토스. 루치페로의 세 입 중 두 입에 물려 영원히 씹힌다.
이것이 단테의 판단이다. 루비콘강을 건넌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그러나 브루투스의 칼은 배신이었다. 강을 건너는 것과, 건너온 자를 찌르는 것. 단테는 그 둘을 다르게 보았다.
결단은 죄가 아니다. 배신이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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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지옥은 강들로 나뉜다. 각각의 강이 경계다. 건너갈수록 더 깊은 곳으로. 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루비콘강의 논리가 지옥 전체에 흐른다.
Fiumi dell'Inferno — 지옥의 네 강
배신자들의 자리. 루치페로가 그 중심에 박혀 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여기 있다.
단테는 루비콘강을 지옥의 구조 속에 새겨 넣었다. 강을 건너는 것은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이 지옥의 논리이고, 역사의 논리이고, 삶의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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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편 3곡. 카론은 단테를 태우려 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자는 이 배에 탈 수 없다고. 다른 길로 가라고. 그러나 베르길리우스가 말한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카론은 침묵한다. 그리고 단테를 태운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의 강을 건넌다. 그것은 루비콘강보다 더 큰 위반이다. 그러나 허락된다. 섭리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도 그랬다. 법을 어겼지만, 섭리였다. 단테의 지옥 도하도 그랬다. 금기를 어겼지만, 섭리였다.
위대한 것들은 종종 경계를 넘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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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누스는 《파르살리아》에서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를 비극으로 썼다. 공화정의 죽음으로. 폼페이우스의 잘린 머리로. 단테는 루카누스를 존경했다. 림보에서 루카누스도 위대한 시인들의 무리에 있다. 그러나 단테는 루카누스의 해석을 따르지 않았다.
역사는 강처럼 흐르지만, 그것을 읽는 자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된다. 강은 하나다. 그러나 그 강을 건너는 자의 이유는 각자 다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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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유를 찾아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만이 안다.
— 단테, 『신곡』 연옥편 제1곡
카이사르는 자유를 위해 루비콘강을 건넜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 역사는 아직도 논쟁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건넸다. 두려움 앞에서, 법 앞에서, 결과 앞에서 — 건넸다.
단테도 건넸다. 어두운 숲에서 지옥의 문을 향해. 두려움 앞에서, 죽음 앞에서, 미지 앞에서 — 건넸다. 카이사르의 건넘이 세상을 바꾸었다. 단테의 건넘이 문학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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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루비콘강을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강들을. 건너야 하는데 두려운 것들을. 건너면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글을 쓴다는 것도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이다. 쓰기 전의 나와, 쓴 후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말해버린 것은 말해버린 것이다. 기록된 것은 기록된 것이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강가에 서서 망설이는 자는 영원히 강가에 있다.
건넌 자만이 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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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루비콘강 앞에 가본다.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다가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매일 작은 루비콘강 앞에 선다고.
쓸까, 말까. 말할까, 침묵할까. 보낼까, 지울까. 그 강들은 이탈리아 북부의 그 강처럼 폭이 넓지 않다. 깊지도 않다. 그러나 건너면 돌아올 수 없다.
카이사르는 강가에서 망설였다. 그리고 건넜다. 나는 오늘 몇 번이나 강가에서 돌아섰는가.
커피가 식는다. 강은 기다리지 않는다. 주사위는 내 손 안에 있다.
글
달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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