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B movement is
작은 물결이 큰 바다를 만나게 된 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덕분이었다. 거대한 여성혐오의 집약체나 다름없는 인물이 대통령을, 그것도 두 번이나 맡게 됐다는 사실은 미국 여성들에게 큰 허탈감을 안겼을 것이다. 4B movement (한국에서는 '4B운동'이라고 불린다.)가 전 세계 인터넷상에서 조금씩 두각을 드러낸 건 사실 거의 일 년 가까이 되었다. 4B movement 란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의 네 가지를 지향하여 가부장제의 해체를 불러내는 한국의 여성운동인데, 4B라는 명칭 또한 '비'로 시작하는 한국어를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이러한 4B movement가 미국 대선 직후 틱톡에서 트렌딩 되며 수없이 공유되고 있다.
내가 페미니즘을 접한 건 2015년 무렵이었다. 이른바 '메르스갤러리'라는 게시판이 생겨나며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우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모습이었던 것을 당시 인터넷 좀 하던 사람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페미니즘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양성평등 글짓기 대회에서 무려 '역차별'을 주제로 글을 써낸 적이 있다.) 그런데 다음 해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졌다. 분명히 여성만을 노려서 범행을 저지른 것 같은데, 무차별 살인이라는 명칭이 붙어 정리되는 상황을 보아하니 요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같은 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건물 여자화장실에서 어떤 남성이 칸막이 안에 몰래 들어가 사진을 찍다가 경찰이 체포해 가는 사건이 생겼다. 당시 연락하고 지내던 남자에게 해당 사건을 말했더니 재밌었겠다고 말했다. 재밌었겠다고? 그는 분명 경찰이 오는 사건이 생겨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후로 무서워서 한동안 공중화장실을 쓰지 못했다.
이후 인문대에서 공부하며 페미니즘에 대해 수없이 토론하고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동기들과 한참 관련 이야기를 나눌 당시 가장 부러워했던 건 미국의 페미니즘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천국과도 같아 보였다. 모두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발언하는 이는 사회적으로 욕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와 정반대인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숏컷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행당하는 여성이 있었고, 국가대표 여성이 숏컷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고, n번방 사건이 일어났고, 최근 딥페이크 사건까지, 다 적어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었다. 하나하나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여성들은 조금씩 변했다. 사회적으로 찍힐 낙인이 두려워 앞으로 나서지 못하더라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았다. 그렇게 한국의 여성들이 조용히, 하지만 묵직하게 해 온 움직임들이 이전에 내가 천국으로 생각해 왔던 미국으로 수출된 것이다. 알고 보니 미국도 그다지 천국과 가깝지는 않았다. 그저 인셀에 불과한 나이 많은 남성이 대통령에 당선된 걸 보니 말이다.
4B movement가 미국에서 얼만큼 더 트렌딩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쳐있던 한국 여성들에게 조금은 활력을 줄 수 있었던 특별한 이벤트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의 움직임이 틀리지 않았다. 빠르게 발전해 왔기에 더 많은 저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다.
최근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이슈로 대학생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 역시 들썩이고 있다. 남자들의 천국과도 같았던 공간에서 여성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남학생들은 어디에서 지령을 받았다느니, 외부에서 계정을 사서 들어왔다느니 하며 부정하고 있지만 여학생들은 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의 표출이라는 것을. 또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들이닥치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