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체능 싹은 고학년이 되기 전에 잘라내라

대치동 교육 트렌드

by 대치동 비둘기

아이 친구 엄마들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학교에 들어간 첫째가 갑자기 음악을 전공하고 싶다고 해서

머리가 복잡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unnamed (1).jpg 출처 Gemini 음악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

악기를 어릴 때부터 배웠고 재능이 있다면 밀어주려고

예체능 중 어떤 부분에 재능이 있을까 하여

여러 선생님들께 배우게 해주었었는데

해보자고 할 때는 싫다고 해 공부를 하려 대치동에 왔더니,

뒤늦게 자신의 재능이 음악인 것 같다고 해서

갑자기 예중 입시를 준비하느라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KakaoTalk_20251007_160034934.jpg 아이의 전자 피아노



이동네는 초등학교 3~4학년 때
체르니 40 정도 치고 나면 피아노학원을 그만 둔다던데




반포와 대치의 다른 점 중 하나는,

반포는 예체능도 시키고 공부도 시키느라

이중으로 돈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대치에서는 재능이 없다면

예체능을 굳이 고학년까지 시키지 않고

적당히 할 줄만 알면 공부와 관련된

학원만 보낸다고 했는데 모두들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가 오가면서

아이가 수학 학원에서 성적이 떨어지더니,

알고 보니 운동 다니느라 힘들어서 그런거라

운동 하나를 그만 뒀더니 성적이 제자리를 찾았다던가,

음악을 제대로 입시 준비 하려면 선생님을 3명 정도는 붙여야 한다던가,

예체능에는 돈이 어마무시하게 든다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도 오갔다.




unnamed.jpg 출처 Gemini 예체능의 정의



예체능의 싹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에 잘라내야죠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그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져서

괜시리 마음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잔인하게 들리는 이 말을 곱씹고 곱씹다 보니

그날 생각이 너무 복잡해져서 밤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일단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은

모두들 동의하지만,

재능이 아니라 생각되면 굳이 계속 학원비를 들여

키울 필요는 없지 않냐는 의미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unnamed (2).jpg 출처 Gemini 바이올린 개인 교사


내가 생각하는 단순한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개념이 아니라

재능이 있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선생님(국가 대표라던지 유학파라던지)들의 레슨을 붙여주는

교육 방법의 차이와 그런 배움의 기회를 제공받는 이야기가 부러웠던 기억을 곱씹어보면,

무조건 공부만 시키고 단순히 예체능을 안시키겠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탁월한 재능이라면 분명히 보일 테니까

어쩌면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검증되지 않은 학원이나 선생님에게

아이를 보내기 보다는,

능력이 검증된 선생님들의 눈으로 보기에

우리 아이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어릴 때

확인한다는 개념인 것 같았다.




일찍이 아이의 재능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찾아보는 엄마들의 부지런함과 그 능력에 비추어보자면,

물결이 흐르는대로 아이가 해보고 싶다면

학교와 가깝거나 친구가 다닌다는 학원에 등록해

재미를 느껴보고 꾸준히 해보라고 하는

내가 너무 안일하게 느껴졌다.




싹을 자른다



그 말에 덜컹 내 마음이 내려앉은 건 도대체 왜일까.



가야할 방향이 아니라면

가지를 쳐내야함을 마땅하지만,

10세 이전에 영특한 재능을 보이지 않는다면

예체능의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만 같아 무척이나 현실적인 그말이

괜시리 기묘하게 느껴졌나보다.



어른이 되어 문득,

엉덩이 힘을 키워 부모님이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 느껴지는

공허함은 공부만 하며 암기식으로 외우고 시험보기만 잘했을뿐,

사람답게 몸을 쓰는 재능이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고

요즘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멋지게 연주할 줄 아는 피아노곡도

아름다운 음색으로 부를 줄 아는 노래 한 곡조도

잘하는 운동 종목 하나도 없는 나는

AI 시대에 가장 먼저 밀릴 인간상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은

아마도 AI가 훨씬더 이미 잘하고 있을테니까.




그런데 지금 커가는 아이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는 교육을 받고

자기의 인생을 즐길 만한 재주 하나 없어

어른이 되면 나처럼 부끄럽고 후회되는 건 둘째치고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알고 배워야

미래 시대에 행복할까 쓸데없는 걱정과 잡념이

끝나지 않고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연장선 중 하나로

호주에 살고 있는 이모집에 놀러가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을 때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움을 느꼈다.



피부가 탈까봐 손과 다리를 다 가리는 래쉬가드를 입고

혼자 뜰 줄도 몰라 발이 닿는 곳에만 서서

아이에게는 구명조끼를 끼워준 채로 놀아주고 있다가 주변을 살펴보니

그런 요란한 차림과 혼자 물에 뜰 줄 모르는 사람은

그 넓은 수영장에서 단 두 명, 아이와 나 뿐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수영도 못 한다는 자괴감과

언뜻 두 세살로 밖에 안 보이는 어린 아이를 아빠가 물에 던지며

(적어도 K-엄마 눈에는 그렇게 보임) 바닥에 던진 수경을 찾아 오는 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며

물에 절대 빠지지 않게 하겠다고 꽁꽁 애를 싸맨

나의 과도한 개입과 우려가 정말이지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게다가 이제 막 올라온 아이를 웃으며 잘했다 칭찬하고

다시 내던지는게 아닌가.

(당연히 안전 장비는 없이 그냥 떠서 노는 아이들)




악기나 운동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 아쉬워

KakaoTalk_20251007_160843653.jpg 아이가 냅킨에 그린 자기 그림

내 아이는 어린이 되어

무언가 신체를 사용해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거나

건강한 몸을 가진 자유롭고 자신있는 어린이었으면 하는 바램에

사실 나는 아직도 아이가 다니는 학원의 대부분이

예체능에 포진되어있다.

(문화센터 포함)



그런데,

재능이 아니면 잘라내야 한다니,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고 그게 진리일지도 모른다.

공부가 돈이 제일 적게 든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밀려오는 두려움이랄까 문화충격이랄까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나는 꽤 오래 머물러야만 했다.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지 않고

로드맵이 짜여져 있는 자녀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만 추려내는 감별력마저 완벽한

엄마들의 계획을 듣고 있노라면

어디가서 무계획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너무 안일하고 나태한 부모로 느껴져 허무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세상살이 10년도 안 된 아이의 재능이

공부인지 예체능인지 알아볼 수 있는 개인 교사를 붙여주지 못하는 것도 아쉬울 따름이다.




KakaoTalk_20251007_161156791.jpg 아직 모종 상태의 식물들


솔직히 가보지 않은 길이라 나 역시도 잘 모르지만

10세도 안 된 나이에 안 가도 될 길을 정해줘 닫아버린다면,

아이의 인생이 재미없어 지는 거 아닌가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드는 것을 보니

아마도 나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이 분명하다.

keyword
수, 일 연재
이전 03화초등학생 방학 캠프의 스펙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