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자(각) 타임을 깨닫고 또 안 본 척, 아직은 아닌 척, 앱을 후다닥 꺼버리곤 했어요.
투고를 했습니다.
브런치 서랍장엔 20칸의 서랍이 넘쳐나고, 노트북 내 이름 폴더엔 5개의 중단편 글이 반쯤, 혹은 조금 더 길게 쓰여 있지만, 매해 공모전 D-DAY 가 다가오면 가슴이 떨려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갈팡질팡 병에 걸리기도 하지요.
그러다 큰맘 먹고 투고를 했습니다.
색깔이 잘 맞는 출판사를 골라 10군데 메일을 보냈는데 4군데에서 답장을 받았지요.
과연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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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물론 거절의 답장이었는데 참으로 출판사다운, 아름다운 답장들이 왔습니다.
옥고를 보내주신 데에 감사하며.... 내용이 흥미롭게 여겨졌으며... 전 직원이 검토하였으며.... 우리 출판사와 결(?), 색(?)이 맞지 않아서... 안타깝게도.... 부디 좋은 출판사를 만나셔서....
그 4개의 메일을 아직 지우지 못하고보관 중이나 다시 읽어볼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아
답장을 받았을 때 마음이 기억하는 문장을 더듬어 써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 "흥미"라는 단어에 꽂혀 한동안 구름을 둥둥 떠 다니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괜한 의심의 촉으로 흥미라는 단어를 써준 출판사에 받은 거절 메일의 한 문장을 그대로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결과, 토씨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답변을 받은 분이 계시더군요.
아니, 내 글이 별로면 이런 글은 좀 별로다.
이런 글로는 책이 안된다.
아님, 이 방향은 어떻냐?라고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를 흥미롭다고 복붙 해 주시니 쓸데없는 희망을 갖게 되잖아요?.ㅠ.ㅠ
제가 보낸 출판사 리스트를 듣더니 지인은 입을 떡! 벌리고 답변을 못 받을 만도 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제가 투고를 하고 싶은 출판사는 소규모 출판사였는데 그 출판사 대표님이 최근에 쓴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너무 감동했었거든요. 그 출판사에 투고를 한 뒤 기획안 만들고 편집하느라 열심히 공들인 시간이 아까워 국내 top10 출판사에 덤으로 보냈더니...!
이렇게 쓰고 보니 민망하군요.
여하튼 소원하던 그 출판사만 그 후로 몇 달이 지나도 메일 수신확인함에 '읽지 않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네요.
한국사 시험을 쳤습니다.
23년 마지막 시험을 응시했고 정말 핑계지만 매우 바쁜 중에 시험을 응시했던지라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내 인생에 고시생처럼 각 잡고 공부하고 시험 칠 수 있을 날이 앞으로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바쁘고 힘든 와중에 공부를 해야 시험이란 것을 치를 수 있다는 삶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더군요.
한 가지 다짐을 했는데 딱, '시험 1주일 전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등을 바닥에 붙이지 않으리라...!' 라구요.
그러곤 일주일 동안 정말 단 한순간도 등을 바닥에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거실 한 중앙에 상을 펴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밥상에 엎드려 잤습니다.
새벽에 물 마시러 나온 남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렇게 잘 거면 그냥 누워 자요. 여보는 20대가 아니라 40대예요~!"라고 애절하게 소리쳤지만
내 걱정보다 7일 내내 끄지 않는 거실의 보일러와 전깃불이 아까운 듯 보였습니다.
"나 자신과 한 약속이라서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고 일주일 동안만 내버려 두세요"라고 화답하고 저는 일주일 동안 계속 꾸벅꾸벅 졸며 밥상에 엎드려 잤습니다.
일주일을 비몽사몽 지내다 시험을 치러 갔는데 이상하게도 정신이 영롱하게 맑아졌습니다.
느낌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시험장에 저를 데려다준 남편은 의리로 아침부터 분주히 수행하긴 했지만, 별 기대는 하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본 제 모습은 거실불을 종일 켜고 밥상에 머리 박고 자고 있는 아내의 뒤통수뿐이었을 테니까요.
시험장 교실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약 1년 전 67세의 모친께서 이 어린 친구들과 시험을 치르고 한국사를 92점으로 1급을 합격하셨을 땐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지, 다시 한번 대단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젊은 내가 엄마보다는 잘 봐야지 않겠냐는 알량한 자존심에 퇴실가능 시간이 되자마자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마지막 1분까지 초 집중하여 시험지를 보고 또 보고 마킹을 확인하고 나왔습니다.
가뿐한 마음으로 나오니 멀리 남편이 다가오더군요. 벌써전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길래 시험이 끝난 줄 알고 여보 못 찾을까 봐 달려 나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더라고, 여태 시험을 쳤냐고 묻기에 시험 치기1주일 전등을 바닥에 닿지 않게하는 것,그리고 시험장에서 마지막 1분까지 집중하는 것이제가 시험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대답했습니다.
맙소사, 1점 차이로 2급이 된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 이번엔 계산기를 꺼내 제대로 계산을 해가며 다시 채점을 했습니다.
이번엔 2점이 모자랐습니다.
휴 다행입니다.
1점이 모자란 것보다는 2점 모자란 것이 덜 아깝고 덜 억울하고 덜 기분 나쁘기 때문입니다.
아쉬워하는 나를 보고는 남편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내가 0점을 맞을 줄 알았나 봅니다.
어쩜 그런 정상적인 점수가 나올 수 있냐고 눈빛으로 묻습니다.
그 눈빛은 20여 년 전 엄마가 늘 내게 보내던 것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대학교 시험기간, 거실 중앙에 밥상을 펴고 늘 졸고 있는 딸에게 제발 좀 누워서 자라고 사정하시며 거실불을 끄시던 어머니 또한 시험기간에 보신 것이라곤 늘 딸의 엎드려 있는 뒤통수뿐이었는데, 두어 번 장학금도 받을 만큼 성적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거든요.
책 위에서 엎드려 자고 있으면 제 정성이 갸륵해서 무의식이 활자를 머릿속에 넣어주는 것도 같습니다.
졸면서 엎드려서 본 책의 장면이 어떨 땐 뜨문뜨문, 또 어떨 땐 뚜렷하게 기억나기도 하거든요.
이사를 했습니다.
따뜻한 남쪽지방에 살던 제가
경기북부에서 3년
경기서부에서 3년
이제는 경기동부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를 오자마자 자동차 엔진오일을 갈러갔더니 기사님께서 중고차를 구매했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차를 산 지 10년 동안 가깝지 않은 4곳의 지역에서 서비스 기록이 있었나 봅니다.
3년마다 직장을 옮기는 직업을 가진 남편도 아닐뿐더러 경기도 그 어디에도 연고가 없는데 이렇게 삼각점을 찍은 데엔 사연은 많지만 지금은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겨울에만 이사를 3번째네요.
그래서 늘 타지에 대한 첫인상은 참으로 춥고 쓸쓸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지방을 떠날 때 "빛나는 언어가 다른 원주민 마을에 이사 가더라도 하하 호호 즐겁게 잘 지낼 거라서 걱정 없어~!"라고 나를 환송해 준 지인의 말에 힘입어 열심히 경기도 생활을 했었지만, 이제는 아이들 학교 때문이라도 더 이사를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초등학교를 옮긴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은 것 같습니다.
걱정 가득한 엄마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오롯이 스스로 적응해 나가야 할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1년 전부터 조용히 시작한 일이라 주변분들 밖에 잘 알지 못하지만
두 번째 직업으로 선택한 이 일을
아주 사랑하고 더욱 본격적으로 해 볼 예정이기도 합니다.
책은 여전히 꾸준히 읽고 있으며 이제는 속독과 다독이 아니라 '다상량' 하고 있으며 꾸준히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