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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Dec 30. 2022

엄마의 희망

엄마는 자주 희망을 이야기하곤 했다.

'행복', '사랑' 만큼이나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단어가 나는 '희망'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마에게 희망은 추상이라기 보다는 이벤트였다.


- 이번 주말에 가서 먹을 고급 중국집의 깐풍새우

- 다음 달 개강 때 입을 새 옷 쇼핑

- 내년 휴가에 떠날 유럽 여행

- 연말에 있을 동창들과의 모임


기대되는 이벤트들을 엄마는 희망이라고 불렀다.


- 엄마, 지금 우리 형편에 유럽을 어떻게 가.

 

K 장녀로서 철없는 엄마에게 이렇게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 그럼 희망이 없잖아.


라고 대답하는 엄마였다.


와, 정말 철이 없다. 유럽 여행이 희망이라고?

희망은 뭔가 더 숭고하고 높고 깊은,

그러니까...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그...

암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거 아닌가?

성스럽고 철학적이고....그런거.


지금 나의 희망은

연필 한 자루 이다.


휴가가 끝나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쌓여있는 일들을 하나씩 이면지에 적어내려가며

머리속에 집어넣는 작업을 할 때 쓸

새 연필 한 자루.


나는 나의 희망을 두 종류나 구비해두었다.

2HB 와 HB.


2B 연필은 심이 너무 물러서

큰 아이가 꾹꾹 눌러 쓰면 바로 부러져버리는 것이었다.

2B 는 스케치 용이구나.


알록달록한 2HB, 새까만 HB.

한 자루 씩을 출근용 가방에 넣어두었다.


새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흰 종이에 사각사각 써내려가는 새 날의 시작.


출근하는 일이 기다려지고

쌓여있는 일도 하고 싶어진다.

연필 한 자루가 가져다 준 부푼 마음이다.


엄마의 희망도

그녀의 하루 하루를 버티게 해 주었겠지.


연필로 찾아온 희망이 사그라들고나면

새로운 희망이 고개를 든다.

그것은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일수도,

아직 끄지 않은 트리의 전구불빛 일수도 있다



작심삼일, 이 아니라

희망삼일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아무에게도 인정받을 필요없는 나만의 희망

하루를 살기 위한

아주 작은 희망 조각 하나.


그 한 조각으로 힘을 내어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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