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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살다 Jan 26. 2023

엄마의 엄마 코스프레

아이를 낳아본 엄마들 중 몇몇은 느껴보았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 자동으로 입력되지 않는 모성애가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출산을 하면 바아로 아이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그에 동반하는 책임감, 그리고 희생에 대한 의연함이 activate 되는 건줄 알았다.


그런데.

왠 걸.


나는 그냥 여전히 나였고,

사랑, 책임감, 당연한 희생 같은 것은

시간과 노력, 그것도 무진장 다양하고 크고 작은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탑재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한 겹, 또 한 겹

층층이 쌓여가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를 알고

아이에게 맞는 방향으로 키우는 일도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내 뱃 속에서 나와 내 젖을 먹고 자랐다고

텔레파시처럼 그 아이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꾸준한 관찰, 세심한 대화, 그리고

아주 많은 포옹과 뽀뽀로 나의 사랑을 전달해주는 하루하루가 있어야 조금은 아이와 가까운 엄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요즘이다.


우리 엄마는 아무래도 엄마가 디자인한 자신의 모습 중 하나가 엄마였던 모양으로, 지금 기억에도 아주 자주,


- 내가 엄만데.

- 내가 너 엄마거든?


이란 말을 했다.

그럴 때의 엄마의 표정은 아주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다.


준비물을 챙겨주고, 저녁 거리를 밖에서 사오고,

또 뭐였더라,

아무튼 '엄마 생각에' 엄마 역할에 부합하는 미션을 수행한 날이면 늘 그런 표정이었다.


가뭄에 콩나듯 엄마와 함께하는 저녁이나 주말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고

식탁에는 엄마의 쪽지가 예쁜 그림과 함께 나를 맞았다.


- 사랑하는 우리 딸, 잘 잤니?

- 하늘만큼 우주만큼 사랑해.

- 엄마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그리고 볼에는 엄마의 립스틱 자국이 늘 선명했다.


엄마가 나에게 편지를 쓰고 뽀뽀를 해주고 갔구나.

엄마는 나를 사랑함에 틀림없구나.


엄마가 남긴 사랑의 증거들이 나에게 믿음을 주었다.


증거는 또 있었다.

직장 동료나 친척들과 함께 있을 때

엄마는 잘 웃는 수다쟁이였는데,

대부분이, 워킹맘이 겪는 고초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잘 자라주는 딸들에 대한 고마움이 주요한 레파토리였다.


주변에서는 모두, 어쩜 그렇게 일도 잘하시고 아이들도 공부를 잘 하게 하느냐, 정말 슈퍼우먼이다 라는 리액션을 쏟아부었다.


엄마는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나와 동생을 바라보았고

가끔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갑작스럽게 와락 우리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참 어리둥절 했던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는 엄마가

우리와 셋이 혹은 나와 단 둘이 있을때는

과묵하고 무표정해진다는 것이었다.


쪽지에 가득차있던 사랑의 말도,

볼에 선명했던 엄마의 뽀뽀 자국도,

내 옆에 있는 엄마는 해주지 않았다.


이럴리가 없는데,

엄마는 나를 엄청 사랑하는데?

그야말로 수사물에서 보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사랑이었다.


엄마는 늘 어딘가, 무언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차있는 듯 해서 

나와 동생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 누구와 친한지,

무엇을 하고싶은지, 어디 아픈데는 없는지.

심지어는 시험 후 성적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엄마에게 말을 걸고 싶은 내가


- 엄마 나 시험 잘 봤어.

- 엄마 나 또 반장됐어.


하고 좋은 소식들을 통보했을 뿐이었다.

좋은 소식이 아니면 엄마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크게 말하고 두 번 세 번을 말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였다.


좋은 소식은 정확히 기억하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자랑하는 엄마였다.


나 또한 워킹맘으로서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얼마전 읽은 책에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 옆에 존재해주는 것. 이라는 구절을 읽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고민하고 경험하는

그들의 시간을 함께 지켜보고, 대화하고, 응원해주는 것 까지가 부모가 할 일 이라고 한다.


그게 다야? 라고 할지 모르지만

옆에 있어주는 것과

그들의 마음 가득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일인지,

나는 요즘 조금 알 것도 같다.


나의 엄마도

그 시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다만 아이와 가까워지려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반드시 순간 순간 진심이어야 했다는 것.


편지로 가득한 99일이더라도

하루는 엄마의 품 안에서

그 편지 안의 말들을 실제로 들려줬어야 했다는 것.


코스프레는 금방 탄로가 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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