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볶았죠

변신 노력(아빠/남편)

by 박점복


변명으로, 핑계로 일관하자면 거미 꽁지에서 술술 풀려 나오는 거미줄처럼 한도 끝도 없을 테니 차치하련다.

김밥이 먹고 싶다며 계란이며 햄, 시금치, 노란 무 등등을 준비한 채 찹쌀밥에 요리저리 기름 바르며 아빠인 날 부른다. "아빠! 당근 좀 볶아 주세요"


대단한 금과옥조라도 되는 양, 꿈적 않고 앉아서는 갖다 바치는 음식 따박따박 받아먹기만 했을 뿐 주방 근처는 가 볼 생각조차 않았던 내가 변하기 시작한다.


누구 명령(?)인데 감히 거부라니 딸을 사랑하는 아빠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거국적으로 요리는 나와는 상관없는 딴 세상 일이고 말고라며 거들 떠 본 적 없었는데. 조선 시대 무슨 양반이라도 되는 양......


상전벽해 확 달라진 디지털 세상에서 돌이켜 보니 '아니, 저렇게 같잖은(?) 권위에 싸여 한치도 벗어날 줄 모르고 떵떵거렸단 말인가' 생각조차 불경했던 게 그리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당근을 내가 볶아서 그런 걸까? 함께 만든 김밥에 나름 애정이 간다. 물론 맛도 시장에서 사 먹는 김밥에 비할 바 없고 말고였다.


겨우 김밥 몇 줄 싼 거 가지고 마치 상당히 가정적인 남편, 다정한 아빠라도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니. 묵묵히 군소리 한 번 없었던 아내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60이 넘고 현직에서 내려와서야 겨우 깨우칠 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 둔하기도 했고.



'참 빨리도 깨달으십니다, 그려!' 여기저기서 빈정대는 소리도 들린다. 저 쪽에선 '에이! 아직은 그래도' 라며 남자 위신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란다. 불편해하는 무리 역시 여전히 많다.


함께 벌어야 작은 삶의 여유 라도 근근이 누릴 수 있을까 말까 하니 한쪽으로만 요리 업무를 몰아붙이지는 말았으면. 노파심이다. 앞선 자들의 좌충우돌을 간접 경험으로 활용하면 시행착오 충분히 줄이고도 남으리라 기대하면서.


여전히 맘 한 편에선 이런 소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긴 한다. '그래도 나 정도 되니까 주방에서 당근이라도 볶잖소!, 고마운 줄 알긴 해요?' 들키잖게 거드름도 피워 본다. 머쓱한 건 오롯이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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