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첫 번째
그 해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직장에서는 새로운 부서에 들어갔고, 퇴근 후에는 또 다른 열정을 품고 밖으로 나갔다. 내 힘으로 직접 번 돈으로 경험을 사러 다녔다. 아직 세상에 궁금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부만 알고 살기에는 눈 돌아갈 곳이 너무 많았다. 특히 얼핏 보면 나와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에 눈길이 갔다. 예술이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예술가들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작품에 어떤 마음을 담아 놓았는지,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해 냈는지 알고 싶었다. 나와 너무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분명 그들과 나의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세계를 이해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마음속 공허함을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어느 가을날, 미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모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모임은 한남동의 한 갤러리에서 진행됐다. 낮의 갤러리는 문을 닫고, 늦은 저녁부터는 약속된 사람들만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런 장소에 비밀스럽게 초대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용하고 어둑한 골목에 환하게 밝혀진 갤러리, 그 문 앞에 서니 괜히 긴장감이 밀려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의자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서로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적막이 흘렀다. 상상했던 시끌벅적한 모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모임 시작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적당한 대화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역할이 필요했다. 모임장님은 그의 임무를 완벽히 파악하고 우리를 천천히 그림의 세계 속으로 이끌어주셨다. 그림을 볼 때 느끼는 각자의 감정을 말할 수 있게,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당당히 말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어느 날은 모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모네의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의 눈이 특히 반짝였다. 모네의 그림만을 보고 느껴지는 감정도 특별하지만, 그의 일생을 알고 다시 보는 그림은 또 달랐다. 그가 정원에 얼마나 진심을 다했는지 알고 난 후에는 그것들이 더욱 생생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모네의 작품을 직접 본 적도 없는 나도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그림을 직접 본 이들은 어떻겠는가. 모네의 작품을 보며 빛과 물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들을 보았다. 말이 없던 사람들이 모네의 그림을 두고 열정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그림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느끼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그림을 그렇게 깊게 사랑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궁금했다. 그가 그린 빛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으며, 그것이 사랑이 되고 단단한 애정으로 굳어졌을까.
모네를 사랑하는 그들 중 한 명은 건축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그는 살면서 파리에 12번이나 갔다고 했다. 그저 파리가 너무 좋아서, 가도 가도 볼 것들이 너무 많아서. 하지만 아무리 파리가 너무 좋다고 한들, 어떻게 같은 곳만 그렇게 여러 번 갈 수 있는지 의아했다. 돈도 많이 들 테고, 시간도 많이 들 것이었다. 그런 문제들을 차치하고 그 도시에 가도 가도 또 가게 만드는 매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한 가지를 깊게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보자 부러움이 밀려왔다. 나도 그렇게 지독하게 사랑하는 무언가를, 깊은 연결관계를 가진 무언가를 갖고 싶었다. 그에게 파리를 그렇게도 많이 가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OO님도 지금부터 1년에 한 번씩만 가면 제 나이에는 15번쯤 가 있겠네요.”
깊게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법을 설명할 별다른 언어는 없었다. 사랑이라는 것에 이유가 없었다. 일단 그곳에 가보자. 일단 한 번 가면, 그 이듬해에도 가게 될지도 모른다. 파리를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자꾸 가게 되고, 그곳에 가는 만큼 더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와 깊게 연결된 무언가가 파리였으면 좋겠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직감적으로 그곳이 정말로 마음에 들 것 같았다. 가도 가도 또 가고 싶은 매력을 찾을 것 같았다.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람들의 말도 수도 없이 들었다. 파리에 대한 나쁜 이야기도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파리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리를 그토록 사랑하는 산 증인이 있었으므로,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정말로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