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첫 번째
샤를드골 공항에서 파리 시내까지 가는 전철을 탔다. 열차 내부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의 짐을 내 힘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2주의 시간 동안 여행할 계획인 데 반해 생각보다 짐의 크기는 크지 않았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작은 캐리어에 들어갈 만큼의 짐만 챙겼다. 번쩍 들기에 무겁지 않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에 버겁지 않은 무게였다. 그 작은 짐을 가지고 소매치기가 무서워서 비싼 택시를 타는 것은 옳은 결정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소매치기를 피하려다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이야말로 간접적 소매치기를 당하는 게 아닐까.
RER 열차를 타고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9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도가 안내해 준 길은 이곳에서 지하철 환승을 해서 예약한 숙소까지 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에어비앤비의 체크인 시간은 11시였고, 그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간다면 훨씬 일찍 도착할 게 분명했다. 나는 계획을 바꿔서 역 밖으로 나가 숙소까지 걷기로 했다. 비행으로 굳어진 몸을 깨울 겸 캐리어를 끌고 거리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캐리어를 끌고 간다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한 파리의 거리를 눈에 담으며 걷고 싶었다. ‘Sortie’라고 써있는 곳을 따라, 캐리어를 번쩍 들고 한 계단씩 올라갔다.
드디어 파리의 첫 아침 햇살을 마주했다. 출구를 나오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유럽풍의 베이지색 낮은 건물들이 쭉 이어져 있었다. 우리나라나 근처 동방의 국가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색다른 분위기의 도시에 매혹되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예전부터 유럽에 와보고 싶었던 열망이 넌지시 더해져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끝난 파리 올림픽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즉흥적인 결정으로 선택한 파리에 진짜로 도착했구나. 여태까지 왜 먼 여행을 오는 것을 망설였는지 의아했다. 연차만 많이 쓸 수 있다면, 돈만 많이 쓸 수 있다면, 비행기를 즐길 수만 있다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동양인은 누가 봐도 여행객일 것이다. 그 모습이 딱 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생각보다 각박하지 않았다. 걷고 헤매는 40분 동안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 사는 곳에 지나치게 많은 경계심을 품고 온 내가 예민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걸까. 약간의 안도감이 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풍경도 인종도 다르지만 생각보다 익숙한 느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도시에 생각보다 빨리 적응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지도를 보고 정확한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대충 방향만 정해서 걸었다. 긴 시간 비행을 했지만 캐리어를 끌고 걷는 걸음은 가뿐했다. 하루 전까지는 분명 여름이었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조금은 쌀쌀한 가을 아침을 맞았다. 갑자기 가을을 얻었고, 걷고 있는 모든 길이 아름다웠다. 피곤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모퉁이를 돌거나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풍경은 확확 달라졌다. 어느 골목은 빵집에서 갓 구운 빵냄새를 풍겼고, 어느 골목은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골목은 건물보다 큰 나무들이 웅장하게 일렬로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마치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에 그려진 대로 제각각의 빛과 그림자를 교차하며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파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그림이었다.
파리 골목골목을 천천히 탐방하다가 어느새 숙소 앞에 도착했다. 지도에서 찾은 그곳에는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거대한 대문이 있었다. 그 대문으로 막힌 건물 안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나는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 체크인을 조금 더 빨리 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답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하염없이 기다려도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그때 초록색 대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밝은 미소를 보이며 인사했다. ‘Bonjour!’
그녀는 나에게 대문 안으로 들어와도 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녀를 따라 얼떨결에 대문 안쪽으로 캐리어를 들고 들어갔다. 그녀가 호스트인 줄 알았지만 이 건물 거주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대문 안쪽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건물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당연히 실내일 줄 알았는데, 그 안쪽에는 하늘이 확 뚫린 공용 정원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 건물들이 둘러싸여 여러 층의 집을 만들고 있었다. 문 안에 정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도시, 그것은 나에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는 훨씬 풍부한 것들을 가졌을 때, 나는 가슴이 몹시 두근대는 사람이었다.
정원을 보며 감탄하다가 문득 내가 이 비밀스러운 곳에 들어와 있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남의 주거공간에 몰래 침입해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건물에서 나오는 누군가와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대문을 나가기로 했다. 대문을 나가 길 건너편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에서의 첫 음식으로 크루아상과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아침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도시의 모습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곳 카페에 앉아 아침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도 살펴보았다. 그런 것들을 관찰하면 몰랐던 세상을 알아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다를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매일 일을 하고, 가끔은 여유를 즐기며, 뜻밖의 고민을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까지 와서 무엇을 얻고 싶은 걸까. 이 도시를 최대한 많이 관찰해보고 싶었다.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색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도 알고 싶었다. 여행을 일상처럼 산다면, 일상도 여행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침의 여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알아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고민을 하는 시간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카페의 직원은 수시로 와서 음식이 괜찮냐고 물었다. 이것이 그들이 베푸는 친절의 방식인 것 같았다. 나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크루아상이 너무 맛있다고 온몸으로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