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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토 Oct 26. 2024

비행기는 나의 우주

Paris, 첫 번째

회사에 연차 8개를 냈다. 1년에 15개뿐인 연차 중 절반 이상을 쓴 거다. 그렇게 쓴 소중한 휴가 중 파리까지 가는 데에만 하루를 넘게 써야 했다. 이 여행에서 직항이 아닌 경유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휴가를 돈으로 환산한 금액과 직항과 경유 비행기표 가격을 비교했을 때 경유를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몸이 얼마나 고생하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도 2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 긴 시간을 비행기에서 보내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가뿐하게 흘려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만 있었다.


그런 내 생각과 반대로, 장거리 비행이 참기 어렵도록 고통스럽다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 시간이 즐겁고 빠르게 지나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긴 비행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고통스러워야만 하는 걸까.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10년 전, 미국 동부 여행을 가기 위해 14시간 비행을 한 적이 있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장거리 비행이었다. 그때도 걱정을 가득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가장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과 영화들을 잔뜩 다운로드한 핸드폰을 손에 쥐고. 하지만 도착할 때까지 그 영상들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단지 목베개를 끌어안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14시간 동안 수많은 무의식 속의 상상들을 자유롭게 띄우며 놀았다. 그리고는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그 먼 나라에 금방 도착해 있었다.


미화된 기억이라기엔 떠오르는 고통이 전혀 없었다. 또다시 장거리 비행을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그래서 나의 직감을 믿었다. 스무 시간이 넘는 비행이라도 자유로운 상상 속에 빠진다면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직감이 틀릴 것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도 놓치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세 편의 영화와 읽고 싶었던 전자책 다섯 권을 다운로드했다. 공항 서점에서 나의 여행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파리 산문집도 한 권 샀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들고 가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게 자유를 주는 역할을 했다. 그것들이 필요해지기 전까지 꺼내지 않아도 될 자유, 그리고 필요해지면 기꺼이 꺼낼 자유. 그 자유를 손에 넣으니 무한해 보이는 시간 안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행기가 날아오르자 하늘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지겨워져서 안 봐도 되는 하늘을 오늘은 보기로 했다. 길고 긴 시간 속에 하늘을 즐길 여유 하나쯤은 넣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녁 즈음 출발하는 비행기에서 본 하늘은 평소보다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뭉게뭉게 부풀어 오른 섬세한 그래픽 같은 구름도, 날개 아래로 뻗어오는 주황빛 노을도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나는 정말로 세상과 분리된 기분이었다. 이 편안한 백색 소음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도 괜찮았다. 제한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은 ‘생각’ 이외의 다른 변수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무중력의 생각 속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일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모든 것은 식후경이기에,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 전에 기내식을 먹어야 했다. 나는 비행기에 타면 항상 식사 시간을 기다린다. 배가 불러도 굶주린 사람처럼 그걸 먹을 자신이 있다. 버터향 가득한 식전빵, 기대 이상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음식, 그리고 예상외로 기깔나 보이는 디저트. 여러 나라의 음식을 묘하게 섞어 놓은 메뉴를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 음식에 대해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누가 뭐래도 비행기 안 세상에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와인을 한 잔 곁들이며 10년 전의 고등학생이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는 상상도 못 했던 미래를 가진 나는 자립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 또다시 긴 비행을 하는구나.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배가 차오른 덕분에 긴 비행시간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한한 시간이 있다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여유롭게 공항에서 사 온 책을 펼쳤다. 수많은 전자책들이 있어도 새 책의 종이 냄새를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파리의 이야기를 담아낸 산문집이었다. 그 책을 꺼내 들어 펼치고 천천히 글을 읽었다. 모든 문장을 주워 담으며 여유롭게 읽고 싶었다. 조금의 조급함도 필요 없었다. 책을 읽다가 특히 좋다고 느껴지는 글이 있으면 그곳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미리 챙겨 온 접이식 키보드를 꺼냈다. 스마트폰을 가로로 눕혀 키보드 위쪽에 끼우니 작은 모니터가 되었다. 노트북에 글을 쓰듯 문장들을 하나씩 필사해 나갔다. 어떤 문장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확인했다. 오타가 나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히 자판을 두드렸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늘 위에서는 지금이 몇 시인지조차 알 필요가 없었다.


경유지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갈아타니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평소의 생활패턴 대로라면 자야 할 시간이었다. 의식하지 못했던 생체시계는 제 기능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에 잠을 자야 한다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무한해 보였던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잠도 자야 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나의 세상을 펼치겠다는 목적도 이루어야 했다. 무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결국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불현듯 저 멀리 흘러가고 있는 생각을 발견했다. 홀린 듯 그걸 따라나섰다. 순조롭게 생각 여행이 시작되었다. 꿈인 것 같지는 않았다. 의식이 너무 멀쩡히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따라가고 있는 그 생각은 너무 허무맹랑해서, 꿈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었다. 나는 그 상태를 잠과 깸 사이의 어딘가라고 정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0시간 남짓이 흘러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잠에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비행기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도착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점점 초조해져 갔다. 책도 읽고, 필사도 하고, 일기도 써야 했다. 평소에는 전혀 떠오르지 않던 악상을 떠올려 음악도 만들어야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다운받아온 영화나 책을 펼치려고 했다. 그런데, 뭘 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도착이라고? 말도 안 됐다. 원하는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평소에 미뤄뒀던 모든 생각들을 파고들어 실현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문득, 이 여행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 중 하나가 비행기에서의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비행은 또 하나의 여행이었다. 평소에 묶여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간, 그리고 가장 나다운 모습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무엇을 원하는지, 왜 그것을 원하는지 자꾸 물었다.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공항에서 급하게 세운 파리 여행 계획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것은 내가 진짜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다. 유명한 장소들을 전부 가겠다는 계획은 취소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주변의 공원을 걷고, 빵집에 들러 갓 구운 빵을 먹고,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 하고 싶었다. 파리에서도 평소처럼 똑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을 관찰할 것이다. 무리하지 않고 여유를 즐길 것이다. 나의 우주 속에서 유의미한 결론을 하나 얻어냈다. 이 여행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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