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첫 번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혼자라도 여행을 하게 만든다. 그 호기심만 있다면 별다른 계획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마음껏 쌓아둔다. 그렇게 하면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어디를 여행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아는 것이 있어야 궁금한 것도 풍부해지는 법. 파리로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미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지식 없이 미술관에 자주 들락거렸던 때,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았다. 작품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이나 화풍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야 작품을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날것의 감정은 무에서 시작되는 만큼 자유롭지만, 방황적이고 답답한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파리의 미술관들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 도서관에서 미술사 책 세 권을 빌렸다. 첫 번째는 고대부터 르네상스까지, 두 번째는 인상주의, 세 번째는 모더니즘에 관한 책이었다. 나는 시간 날 때마다 그 책들을 읽고 휴대폰에 열심히 메모했다.
파리 시내에 도착해서 짐을 푼 후 첫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피곤함을 이겨버린 호기심 덕분에 얼른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고 싶었다. 이 동네에 있는 미술관들이 궁금했다. 나는 곧장 구글맵을 켜고 주변의 미술관들을 검색했다. 숙소 주변의 몽마르트르 근처에도 미술관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확 띄는 이름이 있었다.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미술사를 공부할 때 분명 책에서 봤던 이름이었다. 나는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두근대기 시작했다. 휴대폰에 메모했던 글을 얼른 열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생각보다 건조하고 짧은 메모가 적혀있었다. 단 6글자로 된 정보, '상징주의 : 모로'
그는 상징주의의 대표 화가 중 한 사람이었지만, 책에는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평소 습관처럼 마음속으로 긍정을 외쳤다. 오히려 좋아. 책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을 미술관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을 파리에서의 첫 목적지로 정하고 발길을 옮겼다.
미술관에 들어서서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게 표를 살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물론 그래도 된다고 했다. 미술관의 1층에 들어섰을 때, 그 공간의 면적이 아주 넓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쪽에는 작은 방들이 몇 개 있었고,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보였다. 얼마나 많은 공간이 더 있을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미술관 내부의 벽은 온통 그림들로 꽉 차 있었다. 작은 크기의 그림들이 액자 틀을 맞대고 빽빽하게 벽을 채웠다. 안쪽의 어떤 방은 열어젖힌 문 뒤에도 가려진 그림들이 쭉 이어졌다. 마치 그림을 너무 많이 그려서 둘 곳이 없는 친구의 집에 놀러 온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이 나라는 예술 작품이 널리고 널린 곳이구나!
그림들이 벽을 꽉 채우도록 복작복작하게 많은 탓에 하나하나 자세히 보다가는 영영 집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며 그의 마음이나 의도를 대충 짐작만 할 뿐이었다. 희미한 형체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그의 마음. 하지만 같은 방에 있던 나이가 지긋한 백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림을 하나하나 보며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듣거나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식의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의 그림이 정말 놀라워.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있지? 나는 이 그림에서 그의 꺼질듯한 우울함과 분노를 느껴.” 아주 작은 액자들을 일일이 보며 분석과 감정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나도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지만, 내게 와닿은 감정은 그들만큼 크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그가 작업하던 고풍스러운 화실이 있었다. 3, 4층은 아래층들과 달리 작은 방으로 되어있지 않고, 하나의 큰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천장의 높이도 훨씬 높았다. 아래층의 아기자기한 그림과 달리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큰 그림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거대한 그림은 그 크기만으로도 나를 압도했다. 가만히 앉아 압도당하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래층에서 본 작은 그림과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풍채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한동안 멍을 때렸다.
그림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작은 부분부터 보기. 부분에서 의식의 단서를 발견하기. 그 조각들을 합쳐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해 보기. 큰 그림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작은 것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한참을 앉아 그렇게 보았다. 나는 그가 될 수 없으니, 또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으니,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하듯 나는 나의 속도로 이해한다. 그것에 대해 의기소침해질 필요도 없으므로, 그냥 그 시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