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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 Apr 10. 2022

정동진 가는 기차

글감 : 그해 우리는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그 시간 속, 우리는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양손에는 귤과 음료수, 뭐가 들어가 이렇게 무거운 지 알 수 없는 배낭을 매고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번째 정동진행 기차에 올라탔다. 

보호자 없는 여행길, 새벽기차, 아직 꺼내본 적 없던 주민등록증 

묘하게 두근거리는 이 조건들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무의식 중에 점점 새카만 배경으로 파뭍혀 들어갔다.



잠결에 도착한 정동진은 너무나도 추웠다. 겨울이라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는데다가, 겨울 바다 공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고 있어 내가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탄 건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정동진에는 친구의 친척분이 하시는 펜션이 있다. 초등학생 때 친구 셋이 친구의 어머님과 함께 왔었던 이 곳을 앞자리가 2로 바뀌었다는 나름의 자신감으로 보호자 없이 이 곳에 다시 올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숙소는 여전히 그 펜션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우리는 짐을 풀고 뜨끈뜨끈한 방바닥과 이불 사이에 온 몸을 구겨 넣고는 그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잤을 지 알 수 없는 시간, 하나 둘 씩 눈을 뜨게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뭐해?"

"바다 가야지."

"밖에 너무 추운데. 좀 있다가 나가면 안될까?"

"그런데 배고프지 않아? 밥 먹으러 가야지"

"그런데 우리 뭐 타고 나가?"

"버스 타야 하는데, 노선도 물어봐야 하는데"


다시 막막.. 한 발자국을 내딛기도 전에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때 우리는 휴대폰, 노트북도 없어 지도를 본다거나 교통편을 찾아본다는건 불가능했다. 다들 어쩌지, 어쩌지 하는 말만 반복하면서도 이불속을 파고드는 몸은 움직일 생각은 없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 다음 일을 말해주지 않았다. 어디를 갈 것이고, 무엇을 탈 것이고, 어떤 식사를 할 것인지 전혀 계획이 없었다. '우리 뭐하지?'라는 질문을 2박3일동안 우리의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아마 어른흉내를 내고 싶었던 걸까? 어른이 없는 먼 곳에 가 보고 싶었다. 처음 간 곳에서 모르는 식당에 들어가보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버스를 타기도 하고,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신나하며 택시를 타 보기도 했다. 


마지막 날, 우리는 남은 돈을 모두 털어 편의점의 술을 종류별로 다 사와보았다. 지금이야 냉장고를 가득 채울 정도로 술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그 당시엔 한 팔에 안으면 끝날 정도로 종류가 한정되어 있어 이런 생각도 해보았던 것 같다. 결제를 위해 주민등록증을 확인한다고 점원이 말했을 때, 우리 셋은 비실거리는 웃음을 숨기고 다 함께 증을 내밀었다. 

물론 산 알콜의 절반은 변기가 다 마셔버렸지만, 우리는 그때의 기억을 아직도 추억하며 안주거리로 삼고 있다. 


우리는 그때 무슨 용기로 거기에 간 걸까? 지도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카드도 없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아마, 아무 생각이 없었던게 아닐까?

오래간만에 열릴 주황색 판도라의 상자를 기다리면서, 그간 묻어 놓았던 '아무생각 없던 시간'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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