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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 Mar 17. 2024

가끔은 살살 달래주기



정성을 쏟아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 식집사다.

작고 예쁜 애들을 못생기고 튼튼하게 만들어 방(화분)을 옮겨주는 나름의 봄맞이 행사도 매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간혹 우리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작은 아이를 더 쪼그라들게 만들다가 내 손으로 장사 지내주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하는, 아직까지 어설픈 2년 차 식집사다.


가끔 사무실에서 화분을 키우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중 유난히 잎 색깔이 예쁜 아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저 식물의 이름은 뭘까? 사무실에서 잘 자라니 반음지 식물일까?

같은 사무실을 쓸 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 아이의 주인에게 쪽지라도 남겨볼까 뚫어져라 그 책상을 노려보고 있을 때,

이런 내 모습을 발견한 동료가 은혜로운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

"저거 아글라오네마네"

몇 주 동안 혼자 고민하며 안절부절했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준 동료에게 커피를 한 잔 바치고는,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여 예쁘게 생긴 아이를 구매하였다.

문명의 기술인 '사진으로 꽃 검색'이라는 기능도 알고는 있지만, 남의 책상을 휴대폰으로 찍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기에 차마 시도하지도 못했는데.. 이제 아글라오네마네 엔젤이 초록색만 있던 우리집에 분홍색을 끼얹어 줄 것을 기대하며 괜히 두근거렸다.


처음 한 달은 잎을 하나씩 솟아내며 꽃까지 보여주길래 이름도 '희미'로 붙여서 잘한다 잘한다를 외치며 보살피고 있었다. 솔직히 편애다 싶을 정도로 다른 화분엔 물도 대충 주면서도 희미는 행여 자리가 안 좋을까, 햇빛이 안 들까 이리저리 자리도 바꿔주며 우리집 가장 명당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겨울이 지나면 큰 화분으로 옮겨줘야지, 그러면 더 튼튼하고 예쁘게 자라겠지, 란 생각에 옮길 화분까지 분비를 해 두었는데 이상하게도 잎이 한 장씩 말라가며 검게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겨울이라 추워서 그런걸까 하며 집 온도도 올려보고 물이 부족한 걸까 해서 계속 겉 흙을 촉촉하게 유지해 줬는데도 변화가 없었다. 잎이 세 장째 떨어졌을 때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흙을 파보기로 했다. 날씨가 추워 분갈이 시기는 아니지만, 흙이 좋지 않다면 새 흙으로 바꿔주는 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겉흙만 마르고 있었지 안쪽이 배수가 전혀 되고 있지 않아 흙이 물을 머금다 못해 빠져 있는 수준이었다.

한동안 잘 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수가 안 되는 경우가 있는 건지.. 낙심하다가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준비한 큰 화분으로 옮겨 주면서 추운 날씨에 지지 말고 새 집에서 잘 자리 잡아주기를 바라며 한동안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시드는 잎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물이 화분 받침으로 잘 빠지고 있어 배수도 문제없다 생각했고 화분도 커져서 이제 뿌리를 잘 내려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희미는 아직도 비실비실하고 가장 큰 잎 조차도 색이 변해가고 있어 이대로 죽게 되는 건가 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안쪽 흙이 또 문제가 될까 해 나무막대로 푹 찌르려는데 어라? 막대가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당황해 뿌리 근처를 쿡쿡 찔러보았는데 다른 곳도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겉 자갈을 치우고 흙을 긁어보니 아뿔싸, 뿌리 근처 흙이 완전히 딱딱해져 있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걸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뿌리 근처 흙이 굳어 식물이 물을 전혀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거라는 걸 알았다. 그간 열심히 준 물은 이 흙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주변의 부드러운 흙을 타고 그대로 빠져버렸던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이유를 고민할 때가 아닌 치료를 할 때이므로 굳은 흙 채로 뽑아 물에 담가 놓았다.

인터넷 세상에 계시는 많은 식집사 고수님들께서 이런 현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처방전을 올려주셔서 그대로 따라 해 보기로 한 것이다. 물에 담가 놓아도 굳어버린 흙이 부드러워지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이 딱딱해진 흙이 뿌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물길이 생겨 물이 뿌리로 가지 못하고 다른 길로 빙 돌아서 나가게 된 것이라 한다.

이 단단해진 흙이 어쩜 이렇게 내 머릿속과 같은 모습일까 생각했다. 직장의 특성상 너무도 많은 정보가 오고 가는 가운데 내 머리에 박혀야 할 지식들이 아무것도 들어오지도 못한 채 밖으로 다 빠져나가버리는 것 같은 요즘이었다. 그 수많은 정보를 스펀지처럼 쏙쏙 흡수하는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내용도 소화하지 못해 새로운 것을 모두 뱉어내고 있는데 말이다. 누가 이 아이처럼 내 뇌를 물로 깨끗하게 씻어줬으면 좋겠다. 주름 구석구석까지 찬물로 싹 씻어서 막힌 회로가 싹 뚫릴 것 같은데.


물을 먹어 조금은 부드러워진 흙을 조심스레 달래 가며 뿌리에서 떼어냈다. 흙을 모두 걷어내고 나니 수염뿌리가 모두 죽어 원뿌리만 애처롭게 남아있어 주인의 무능함에 더욱 미안해졌다. 줄기나 잎은 위로 자라고 있지만 사실 뿌리는 남아있는 게 얼마 없어 최소한의 모습만을 유지하고 있는 게 내 속도 이럴까 봐 무서워진다. 조금씩 구멍 나고 있던 내 겉모습이 사실은 점점 작아지고 있는 내 뿌리를 위해 SOS를 외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내 몸도 희미와 같이 자신도 버틸 만큼 버텨보았으니 이제 안 쪽을 돌아봐 주라고 외치는 중이었을까.  


이번에 사 온 새로운 흙으로 화분을 다시 채우고 뿌리를 엎어 주었다. 새 흙이라 부드러워 물을 계속 채워 주면서 화분의 높이를 맞췄다.

새로운 환경으로 나를 바꿔 끼울 수는 없지만, 나에게도 조금 시간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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