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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sonata Mar 11. 2023

옷걸이 25개

미니멀리즘

2023년 3월 10일 금요일


얼마 전 팟캐스트를 듣다가 <달팽이 식당>의 작가 小川 絲 (1973-) 오가와 이토의 작품 <라이온의 간식>을 만났다. 이 책의 내용은 드라마로 제작되어 2021년 일본 NHK에서 8부작으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미국에서도 일본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아껴가며 감상했다.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스피스 '라이온의 집'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간식에 담긴 추억을 회상하는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듣는 일본 특유의 경쾌하고 밝은 음성의 대화와 소곤소곤 독백이 어우러져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이 포근해졌다. 드라마에 나온 '라이온의 집' 게스트들의 짐을 살펴보면 집에서 보내온 작은 상자 2-3개와 본인이 가지고 온 여행가방이 전부였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려고 호스피스를 선택한 사람에게 그보다 많은 양의 짐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회를 펑펑 울며 보고 나서 나는 벌떡 일어나 옷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총 스물다섯 개의 옷걸이가 걸려있었다. 그중 일곱 개는 빈 옷걸이였고, 열여덟 개의 옷걸이에는 각각 주인이 있었다. 나는 옷걸이에 걸린 옷을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품목 리스트를 작성했다.


- 카디건 (3)

- 재킷 (2)

- 판초 (1)

- 스웨터 (2)

- 니트 (2)

- 면 티 (1)

- 튜닉 (1)

- 블라우스 (1)

- 치마 (3)

- 원피스 (2)


매일 보는 옷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씩 적어 놓고 보니 정말 18개의 옷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 어려웠다. 더 믿기 어려운 건 이 옷만 가지고도 난 아주 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옷걸이가 스물다섯 개인 이유는 '봄/여름'과 '가을/겨울'로 구분해서 옷을 정리할 때, 그 정도의 양이면 충분할 듯해서 만든 초간단 옷 관리 시스템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이다.


다시 옷방에서 나와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옷과 신발과 액세서리와 가방을 보며 신나서 좋아라 했던가. 내 눈에 예쁜 건 너무 많았다. 촉감이 좋고 디자인이 독특하고 세련돼 보이는 수많은 옷들에 마음을 빼앗겨 인생의 약 80%를 살았다. 미니멀리즘을 연습하기 전에 나는 일단 갖고 싶어지면 사야 직성이 풀렸다. 때로는 예쁜 옷과 신발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이건 너를 위한 옷이야. 너만이 소화해 낼 수 있어.' '네가 갖고 있는 그 옷에 이 신발을 신고 이 백을 드는 모습을 상상해 봐. 완벽한 스타일링이 될 거야.''잠깐, 그 옷에는 이 머리핀도 필요해!' 지금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야말로 손발 오그라드는 망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살다가 인생의 짝꿍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스톰은 거의 수행자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스톰은 정말 65리터 배낭 하나에 모든 짐이 들어갈 만큼의 소지품만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우리의 결혼 생활도 23년 차에 들어섰다. 그중의 반을 나는 맥시멀리스트로 살았고, 그중의 반을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보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앞으로의 삶은 지금의 간소한 생활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스물다섯 개의 옷걸이와 함께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다. 그만큼이라면 '라이온의 집'에 마련된 소박한 수납장에 내 옷을 모두 걸어놓아도 공간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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