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꼭 하는 말이다. 그럼 대부분 별일 없다는 말로 돌아온다.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허기진 마음을 밥으로 채워 넣고 나면 별일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온다. 결혼을 준비하는 이에게는 집 문제가 별일이 되고, 아이가 이제 갓 돌을 넘긴 아버지가 된 친구는 아이가 별일이 되어 서사를 전한다. 최근 이직한 친구는 새로 만난 동료들이 별일이 되어 버린 듯, 한참을 말한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 참을 하고 난 뒤, 친구들은 나에게 묻는다.
"넌 별일 없어?"
물음에 난, 늘 한참을 고민한다. 친구를 만나고 난 뒤 있었던 일이 등에 그려진 말이 달리듯 빠르게 흘러간다. 어떤 이야기가 나에게는 별일일까? 짧은 시간, 깊은 고민 끄트머리에 서서 반짝이는 친구의 눈을 보며, 활짝 웃는다.
"난 별일 없지. 그런데.."
자연스럽게 그들의 별일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글쓰기를 하며, 별일이 참 많아졌다. 그저 보는 일이 아니라, 관찰하는 힘이 생긴 탓일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준 마감을 맞추기 위해 생각이 뛰어다니며, 주의 깊게 주변을 본 탓일까?
관찰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항상 곁에 있는 글 뭉치가 있다. 가장 위에 있는 글은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다. 시인이 딸에게 부탁한 일은 공부도 착한 사람도 아니라, 관찰이다. 사물이 변화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라는 관찰.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웃는 모습을 흘려보지 말고 하라는 관찰, 그리고 밥을 챙겨 오지 못한 친구를 찾으라는 관찰.
관찰은 숨은 이야기를 떨어내는 일이다. 나도 될 수 있고, 타인이 될 수도 있다. 나도 알지 못한 마음을 꺼내 놓고 볼 수 있는 기회가 별일을 찾아낸다. 다른 이가 하는 말, 단어 사이사이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이고, 그들이 하는 문장과 문장의 멈춤 사이에 있는 생각을 듣는 이야기가 된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매일 사람들을 만난다. 매일 생각을 한다. 매일 별일이 아닌 날이 아닌 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 건넨 내 별일 없지라는 말에 별일 없다며 사실 숨겨둔 별일을 꺼내 놓는다. 그리고 난 기록한다. 나에게 별스럽게 않게 일어난 일을 별일로 만들어 글로 적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