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CONCLAVE, 2025)

의심이라는 믿음, 확신이라는 죄

by 김뇨롱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게 된 죄는 확신입니다. 확신은 화합의 가장 큰 적이며,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마지막 순간에는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심과 함께 걷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약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고, 따라서 믿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심하는 교황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 콘클라베(2025) 중에서


종교적 현장은 추리 요소로 활용할 것들이 많다. 폐쇄적인 현장, 한정된 용의자들과 그 공간에서 얼키고 설키는 갈등, 넓은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 비해 깊이 만들어지는 감정과 내부에서 발화하고 끝내 내부에서 마침표를 찍는 면모까지. 종교적 현장에서 발생한 추리극은 아예 그 포맷까지 가져도 손색이 없을만큼 추리극에 알맞은 모양을 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 또한 중세 시대의 한 수도원이었으며 피해자들인 수도승에 얽힌 사연들은 저마다 깊고 뒤틀려있다. 그 내부를 파헤쳐 알아가는 윌리엄 수도사와 그 동행인 아드소는 영락없는 탐정과 조수의 느낌을 부추긴다. 그럼에도 이 섬짓한 중세시대 연쇄살인의 끝은 끝끝내 수도원이 자랑하는 도서관이 활활 불타오르며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마감한다.


친인척 없이 홀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한 백작의 고풍스러운 성이나 고대의 무덤, 하다못해 방치된 오두막까지도 밀실 살인을 위해 마련된 한정된 공간이지만 영화 '콘클라베'는 한 겨울 고립된 중세 시대의 수도원보다도 더욱 고립된 상황을 자체적으로 형성한 작품이라 더욱 눈길이 가게 된다. 영화는 이 '폐쇄성'을 굳이 환경적으로 만드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진 무대를 만들듯 각국 추기경의 방문과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물품들의 배치, 환경음 하나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배경음만으로 주변을 만들어낸다. 콘클라베의 단장인 로렌스를 따라 이동하는 시선은 그들의 공간을 제외한 바깥을 비출 때 상당히 냉정하다. 버스에 탑승한다면 카메라는 그대로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비춘다. 대부분의 공간은 콘클라베가 벌어지는 그들만의 공간과 식사를 하는 공간 등 내부의 모습이 많으며 그나마 바깥의 느낌은 이따금씩 그들이 모이는 중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중정은 말 그대로 건물의 가운데 난 공간으로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하늘은 어디까지나 그 공간에 배속된 풍경일 뿐이다. 바깥의 공간을 위해 난 것이 아닌 내부의 공간을 환기시키기 위해 있는 요소. 그래서 영화 콘클라베는 내부에서 벌어지는 암투이자, 좀처럼 풀리지 않는 답답한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끝끝내 이 지리한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게 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교황의 죽음은 짧았으나 영화는 처음부터 첫 번째 용의자를 만들어내며 시작한다. 그와 가장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는 트랑블레 추기경은 처음부터 미심쩍은 표정을 하고는 시원찮은 대답을 꺼내가며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교황의 선종에 대한 기록을 마무리하려 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로렌스는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 그가 보즈니아크 대주교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 벨리니 추기경과 대화를 나눌 적에 그의 옆에 놓인 체스판은 영락없이 각본가의 전작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극 중 정보부의 수장인 컨트롤은 자신의 부하직원이자 각 임원진이 되는 5명에게 동요 속 팅커, 테일러, 솔저, 푸어맨 등의 명칭을 붙였을 뿐 아니라 마치 놀이라도 하듯 그들의 사진을 각각 체스말에 붙여두기도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체스판을 가져가고 싶어했던 벨리니 추기경의 마음이란 그의 내면에 숨어있는 야망을 슬쩍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는 초반에 그렇게 트랑블레 추기경에 대한 의심을 심어두고는 정작 미려한 미장센과 연출로 한껏 콘클라베 시작을 알리면서 또 한명의 용의자를 추가한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 존재마저 몰랐던 사람이 무려 콘클라베를 위해 로마를 찾은 것이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데다 그렇잖아도 쟁쟁한 콘클라베에 또 한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그닥 반길 일이 아니지만 로렌스 추기경은 그 사람 마저도 콘클라베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식당에서 그를 소개할 때에 추기경들의 차가운 반응은 이내 이 공간이 외부인을 그리 반기지 않으며 폐쇄적인 종교적 공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단지 '인간'이 만든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라는 수단을 통해서 바뀌는 것 없이 여전한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초반의 콘클라베 개막 장면은 아름다운 연출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렇지 보통 추리물에서 다뤄지는 용의자 소개 장면과 유사하다. 야욕이 강하지만 다소 생각이 닫혀있는 테데스코 추기경, 아프리카 출신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아데예미 추기경까지 더해지면서 이미 용의자는 4명이나 만들어져있다. 무려 교황이 선종하며 영화가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추리물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이 이후로는 아무도 사망하지 않으며, 또한 '피해자가 곧 피의자가 된다는 점'이다.


고립된 고성에 모인 이들이 아닌, 시스티나 성당에 모인 추기경들에게 있어 '사망'이란 다름아닌 후보 탈락을 의미한다. 속세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끝없이 올라온 그들이 끝끝내 매달리고 추구하려 했던 자신들의 '명예'야말로 그들의 목숨이자 유일한 위안이다. 폐쇄된 공간, 밝혀지는 날카로운 진실은 피의자이자 피해자인 추기경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망하게 만들며 동시에 제한된 공간 속의 모두를 목격자이자, 침묵의 동반자로 만들어버린다. 유력한 용의자들이 한 명씩 후보에서 제명될 때마다 주변의 많은 이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목격하며, 로렌스는 그 와중에도 스스로의 직책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마치 수행이라도 하듯 그들을 제치고 이 거대한 조직인 '교회'가 아닌, 그 조직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도 아닌 오직 교황의 후보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추궁하며 알아나간다. 그가 콘클라베 직전 추기경들에게 설교하며 말한 그 '의심'이란 교황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자신 스스로를 다져가며 한 말처럼 보인다. 때로 온화한 어휘들은 치명적인 실책을 은폐하기도 한다. 날카로운 말은 고통을 동반하고 그들을 베고 들어가 비틀고 뒤집어가며 그 안에 숨은 쓰디쓴 진실을 파헤친다.


그래서 그의 행보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도 유난히 튀고, 날카롭다. 후반으로 갈수록 히스테릭해 보이기까지 한다. 각 후보들의 제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기어코 모든 것들을 파헤친 후 껍데기만이 남아 시체처럼 자리만을 차지하고 이 지옥과 같은 콘클라베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로렌스는 그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견디는 데에 집중한다. 교황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암투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조용히 돕는 수녀들의 사이에서도 로렌스가 기대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던 공간은 그저 그보다 높이 자리한 전 교황의 빈자리일 뿐이었다. 사람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가. 스스로를 문드러지게 질책하며 기어코 그 앞으로 나아가 누구도 원하지 않을 일을 저지르고 고통 속을 헤메는 것은 유쾌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 자의 표정도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것이며 그 상황과 모두를, 또한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때때로 이겨나간다면 그것은 어떤 결론이든 만들어내게 되어있다. 지독하게도 그 결과란 주변으로 흩어지고 조금씩만 영향을 미쳐 하나로 이뤄지고 끝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지만 또한 그것들을 기다리고 만들어낼 수 있을만큼 사람이란 참으로 강인하고 용기있지 않던가.


추리물에 빗대긴 했지만 그 사건의 연쇄성이란 참으로 흥미롭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트릭 내부 중앙을 차지하는 인디언 소년으로 일관성을 만들어냈다면 콘클라베의 연쇄 사건의 중심에는 전 교황이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로렌스가 말한, '끊임없이 의심하는 교황'인 그는 기어코 로렌스를 끌어들여 자신이 무엇을 하고있는지도 알게 만드는 인물이며 결국 콘클라베의 연쇄 사건을 설계한 인물이다. 제법 식상하지만 설계자의 사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늘 사건의 뒤편에서 그 자의 기척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느낌을 준다.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는 그렇게 드러나도록, 문제가 있는 후보는 로렌스가 찾아낼 수 있도록 설계한 점이 치밀하게 느껴진다. 사건의 유기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투적이지만 누구나 느낄만큼 영화는 '인간의 세속성'에 대해 말한다. 화려하고 고풍스럽고 가끔은 과하게 느껴지는 콘클라베의 준비 과정과 진행 과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번거로움을 발생시킨다. 안쓰럽게도 그 번거로움이라는 게 미장센으로 직조된 아름다운 작품이라 보는 이들은 크게 고통스럽지 않다는 게 또 이 영화의 미덕이지만.


연출 이야기가 나와 말이지만 흰색은 이 영화에서만 사용되는 검정색이다. 흰색 뿐 아니라 노란색, 붉은색, 대비를 이루는 약간의 검정 또한 이전부터 느와르 영화에 자주 사용되던 색상이었다. 신성함과 고결함을 상징하는 대신 영화에서는 좀 더 색다르게 쓰였다. 비오는 풍경 속 하얀 우산들이 등장하는 명장면은 그 화려한 의상 속에서 속세의 사람들과 다름없이 논쟁하고 서슴없이 소리지르는 이들을 꼭 가린 채 지나가기 때문에 그들을 더욱 저열해 보이게 만든다. 반면에 수녀를 상징하는 어두운 남색은 오히려 영화에서 더욱 고결한 느낌을 부추긴다. 난색 계열에 침투하는 침착한 한색은 그 서늘함을 유지한 채 화면의 곳곳에서 그들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복고풍의 컬러를 몇 톤 낮춘 채 흐르는 무채색의 향연이었다면 콘클라베는 강렬한 색조가 서로를 응시하는 슬로우모션 난투극같다.


동일한 작가의 전작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이들 중에는 '첩보 영화치고는 아무런 액션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쩌면 콘클라베도 그런 비난을 일부 공유할지도 모르겠다. 트레일러만 본다면 마치 전 교황을 살해한 범인을 찾아내는 추리극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 그런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분위기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미끄러지듯 서사를 짜나간 첩보물이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콘클라베 또한 각자의 야망으로, 의심으로, 고통으로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콘클라베의 첫 투표 이후 로렌스를 바라보는 알도의 눈빛은 분노에 찬 정치가 그 자체이며 난잡하게 식사를 하고 손짓으로 사람을 부르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힘껏 흘겨보는 테데스코는 추기경이라기 보다는 어디 이탈리아 뒷골목의 시정잡배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세 좋게 웃고 화통해 보이는 아데예미는 정작 자신의 일에만 열을 올리고 스스로에게만 너그러운 소인배였으며 친절한 말과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며 조용히 행동하던 트랑블레야말로 뒤에서 모두를 조종하는 위선자였다. 그들이 한 번에 제명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모욕하고 비난하며 추한 진실이 회장을 가득 차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마침내 그 어지럽고 '방해가 되는' 속세로부터 날아온 포탄이 시스티나 성당의 한 쪽 창문을 뚫어버린 순간, 근엄하고 장황하며 날카롭고 어두웠던 현악이 잠시 멈춘 뒤 그저 차가 지나가는 소리나 새가 우는 소리, 나뭇잎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쉼없이 달려오던 영화에 유일하게 주어진 인터미션과 같은 시간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종교라는 것이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싸이고 싸여 마침내 그 모든 것과 단절한 뒤 그 속에서만 또 하나의 조직을 형성할 적에도 이토록 세상이란 계속해서 역동하고 있지 않던가. 기어코 모든 것이 정리된 그 시점에 와서야 제대로 된 콘클라베가 시작된다. 모두가 그 화려한 색채와 암투 때문에 잊어버린, 누군가를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믿어볼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 말이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어떠한가. 어찌 보자면 무서울만큼 전 교황의 계획대로 흘러간 결말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본디 사람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것이 아닌 그 사람의 '행동'이 아니던가. 그렇게 또 한 번 '침묵의 목격자'가 된 로렌스는 마침내 타오르는 흰 연기를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치열하고 고된 의심의 끝에는 또 한 번의 날카로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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