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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ul 24. 2023

한 이불 덮는 사이는 아니지만

chapter1. 동사로서의 잠(2)

자다(동사:생리적인 요구에 따라 눈이 감기면서 한동안 의식 활동이 쉬는 상태가 되다)



어릴 적 어머니와 분기마다 하는 일이 있었다. 하얀 홑청 네 귀퉁이를 맞춰 무명실로 바느질하는 일이다. 하얀 홑청을 반짝거리게 다듬이질해서 안방에 반듯하게 펼쳐놓는다. 그 위에 솜이불을 살포시 놓고 구김 없이 바짝 당겨 네 귀퉁이를 맞추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네 형제 중 그날 눈에 띄는 형제 아무나를 불렀다. 그 아무나 중 하나가 나였다. 대바늘에 무명실을 꿰고 머리에 살짝 긁은 뒤 한 땀 한 땀 주름을 펴가며 꿰매어 간다. 


아직도 어머니 혼자 사는 집에는 솜이불이 딱 한 채 남아 있다. 물론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사 다닐 때 짐만 될 뿐이다. 버리라고 해도 버리지 않는다. 무슨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너희들 낳고 좋은 목화솜을 틀어 만든 이불이고, 이제 어디에 가도 이런 솜이불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나는 말없이 수긍했다. 마음속 꽁꽁 싸매어둔 기억 보따리를 이불처럼 덮고 올 날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솜이불이 무거워 싫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불면증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으니 아무 이불이나 덮어도 잠만 잘 잤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불 하나에도 예민해진다. 추위에 민감한 겨울에는 양모 이불이나 거위털이불까지는 아니어도 두터우면서도 가벼운 이불을 덮는다. 봄가을 같은 환절기에는 때에 맞춰 차렵이불을 사용한다.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어야 잠을 잘 수 있기에 깔깔한 모시이불 정도는 아니라도 냉감 이불로 최소한의 무게감을 유지하며 잔다. 


보통 3월 중순이 되면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고 차렵이불로 바꾸는 시기다. 그러나 이번 봄은 좀체 날씨를 종잡을 수 없었다. 한낮은 20도가 넘는 초여름 기온이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영하였다. 그래도 겨우내 덮었던 이불을 세탁할 필요는 있었다. 대신 차렵이불 두 채를 꺼냈다. 이불 두 채의 존재감이 내 육체를 덮쳤다. 평소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이라 새삼 놀라웠다. 단순히 이불을 바꿨을 뿐인데 그날 밤은 뒤척임도 없이 잘 잤다. 


아기가 잠투정을 한다. 이때 엄마가 안아주면 쉽게 잠이 든다. 사람과 사람의 무게와 숨소리가 들려주는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 자신을 푹 눌러주는 무게감이 심리적 안정감을 만들어낸다. 이제 다 커버린 어른이 되어 누군가에게 안겨 잠을 잘 수 없는 일은 애석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불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비록 솜이불의 묵직함은 아니지만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안고 자는 일은 혼자 사는 나에게 적어도 타인의 온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잠자리가 바뀌면 잘 자지 못한다. 가족 여행이든 친구와의 여행이든, 나 홀로 여행이든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바뀐 잠자리로 인해 어설픈 잠이 든다. 그렇다고 여행 다닐 때마다 이불을 싸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그야말로 남자사람친구인 그는 두 번 결혼했다. 두 번째 결혼은 사내 결혼이었다. 아내와 만난 지 107일 만에 할 뻔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모가 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100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직장 문제로 그와 부인은 각자 지방에 따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은 결혼생활이 안 맞는 사람이고,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며, 누구와 함께 자는 일이 불편하다고 했다. 후배가 와도 자신의 집에서 재워주지 않고 본인 지갑을 털어 여관을 잡아준다. 서울에 거주하는 형 집에 가도 형 집에서 자지 않고 호텔에 가서 잔다. 타 지역에 일정이 생겨도 잠은 반드시 집에 돌아와 자고 다음 날 다시 간다. 몸은 좀 피곤해도 그러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결혼 후 처음부터 떨어져 살았던 것은 아니다. 3년 정도는 함께 살았다. 맞벌이였으니 아파트 공동 경비, 공통저축, 각종 경조사 경비를 각자의 월급에서 제외하고 나머지 돈은 알아서 사용했다. 주말부부로 살면서 통장을 공유하지 않은 지는 8년, 몸을 공유하지 않게 된 것이 어느덧 7년이 되었다. 가끔 만나니 싸울 일도 없다고 했다. 아내는 치매에 걸린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직장과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어쩌다 보는 그에게 전부 풀고 갔다. 


“그런 얘기를 꼭 해야 하니?” “내가 그럴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 다 풀고 가라”고 했다. 하루만 견디면 되었다. 


어쩌다 부부로 살고 있는 그는 두 번 결혼한 사람은 기억력 저하고, 세 번 결혼한 사람은 치매라고 했다. 아내가 어쩌다 그의 집에 오는 날에 아내 몸을 건드리면 짜증을 내며 거부했다. 그래? 그럼 나도 싫어. 쿨하게 인정하며 아내는 안방에서, 그는 거실에서 잔다고 했다. 비록 한 이불 덮고 사는 사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는 기혼자이며 부부였다. 


그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집에 간다고 하니 청소해야겠네, 라고 말했다.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에 들어서니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일찍 일어나 청소하려 했는데 늦잠을 잤다며 궁색한 변명을 했다. 굳이 청소를 하지 않았어도 그다지 지저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정작 그는 집에 들어오면 홀아비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안방에 푹신한 침대 위에는  호텔에서나 볼법한 새하얀 이불이 덮여 있었다. 너무 각이 잘 잡히게 정리되어 있어 물었다. 


-너무 깔끔한데? 

-내가 안 자니까. 

-그럼 어디서 자? 

-거실에서. 어쩌다 와이프가 와서 침대에서 자고 가면 저렇게 정리하고 나는 손도 안 대.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요가 매트가 깔려 있고, 소파 위에는 그가 덮고 자는 이불이 개켜져 있었다. 


내가 잠을 자고 빠져나온 이불의 흔적은 전날 밤 내 잠자리의 혼란을 보여준다. 평소 베개 하나를 무릎 밑에 받치고 자는 나는 일어나 보면 거의 대부분 침대 밑에 베개가 떨어져 있다. 어쩌다 얌전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날에는 별다른 꿈도 꾸지 않은 채 잘 잤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이불을 돌돌 말고 있거나 수면 양말 한 짝이 벗겨져 있거나 하는 날이면 사나운 꿈자리에 뒤척인 날이다. 분명 그의 아내는 내 고등학교 친구처럼 배에 손을 얹고 미동 없이 잠을 자는 스타일임에 분명했다. 


어설픈 봄비가 내리며 한기가 느껴진다. 비록 내 옆에 따뜻한 체온을 유지해 줄 만한 사람은 없지만 내 체온과 체취가 남아 있는 차렵이불을 끌어안는다. 그저 오늘 밤도 잠이 든다는 행위를 무사히 치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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