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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도 Jul 30. 2021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의 주장에 맞서.

판타지나 시대극 작품들을 보다 보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흠이 생기고 그 때문에 결투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일들이 왕왕 나온다. 나에게도 사랑은 흠이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상처였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에 응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누군가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더 나은 내가 되지 않으면 외면당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기저에 있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요구받지 않았음에도 그가 좋아할 것 같은 행동을 하고, 나오지 않는 감정들을 짜내며, 엷은 미소 아래 허탈함을 숨기는 그 모든 과정. 그 모든 날들을 뒤로 한 뒤에 그때를 회상했을 때 내 모습이 항상 구질구질했기에 싫었다. 

이와 정반의 감정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한정'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의 즐거움을 갈라놓는 저기압 지대를 생각할 수 없는 곳에 밀어 넣고, 오로지 사랑이 주는 즐거움을 제외하고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한 번도 '한정'된 상태에 있어보지 못한 나는 기쁨과 행복만을 찾는 가우디움, 래티시아가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대로' 사랑받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나를 지나치게 얽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 또한 누군가를 그대로 사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거다. 그대로라는 단어는 한편으로는 타자로부터 사랑의 대상을 분리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덜 욕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욕망과 향유와 거리를 두었고, 그렇게 결국 끝날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랑은 하찮은 것 덩어리이다. 온갖 사랑의 단상들로 꾸며진 책을 읽어냈음에도 내게 여전히 사랑은 귀찮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고유한 변태성에 의해 인간은 사랑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지 사실 사랑의 대상은 무의미한 존재로, 텅 비어 상정되어 있는 게 아닐까. 결국에 사랑의 대상에게서도 보고 싶은 부분만 투영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사랑은 여전히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랑하기 위해 인간은 살아가고,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남긴다.

이건, 불변의 진리이다.

내가,

사랑해라고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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