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유수유를 끝내던 그날의 기억들
우리 아버지는 할머니가 마흔일곱에 낳은 늦둥이이다. 4남 3녀 중 막내. 첫째 큰아버지와 아버지 나이는 20살 이상 차이가 난다.
따져보니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10년 전에 태어난 분들이시다. 할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이 된 해에 아흔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아버지가 스물여섯 살 때, 우리 부모님께서 결혼을 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그저 구전으로만 들은 존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세 살이 많았고, 열아홉 살에 열여섯 살인 양반 삼대독자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는 것. 이북 함경도 출신인데 남쪽으로 내려오셨다는 것. 110년 전 사람, 그것도 여자였는데 아주 현대적인 이름을 쓰셨다는 것. 이 정도가 내가 아는 할머니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정보다.
부모님이 귀농하여 살고 계시는 시골집에 어느 날 처음 보는 사진이 하나 생겼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서있는 한복을 입은 할머니. 아주 옛날 흑백사진이었다. 요즘은 사진 복원 기술이 좋아졌다. 빛바래 스러져가는 사진을 복원해 아버지는 액자에 끼워놓았다.
엄마도 뵌 적이 없다는, 나는 이야기로만 들은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 모습. 바라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볼록 튀어나온 짱구이마와 쌍꺼풀 진 커다란 눈. 수많은 손주들 중 막내 손녀인 내가 가장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더니, 정말 그랬다. 재미있게도 할머니 얼굴의 그 가장 특징은 어린 내 딸에게까지 또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버지가 완전 늦둥이인 탓에 우리야 할아버지 할머니 금슬이 오래도록 좋으셨던 게 아니냐고 웃으며 추측하지만, 할머니께서는 그 당시 대놓고 너무 창피해 차마 죽고 싶다고 하셨단다. 심지어 며느리 하고 같이 임신을 하게 되셨으니 말이다.
어느 날 만삭이던 할머니께서 조용히 방에 들어가셨는데 바로 금방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단다. 산파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할머니는 방에서 혼자 출산을 하신 것이었다. 영아 때 죽어버린 자녀를 포함하면 그게 10번째 출산이었으니. 할머니는 출산의 프로였을 터. 다른 가족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할머니 행동에 설마 그게 아기를 낳으러 들어간 것이었다고 생각조차 못하셨다나.
아버지는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며 늦둥이의 설움에 대해 가끔 말씀하시곤 하셨다. 늦둥이라서 마치 어릴 때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못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할머니의 모정을 이해하게 된 건 내가 출산과 육아를 겪고 나서였다. 부끄럽다고 하셨지만 막상 막내아들이 예뻐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 예로 아버지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8살 때까지 할머니의 젖을 먹으셨단다. 학교에 다녀오면 책보자기를 던져놓고 안방에 들어가서 엄마 젖부터 찾으셨다고. 그 말 대로라면 할머니는 50대 중반까지 수유가 가능하셨다는 것이었다. 단지 옛날에 먹을 게 많지 않아서 오래도록 수유를 하신 건 아니셨을 거다.
수유를 끝낸다는건, 내가 두 번이나 끝내본 경험으로는 칼같은 단호함이 필요했다. 그것이 내 인생 마지막 수유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큰 결단을 해야했다.
지금 와서 만약 초등학생인 아들이 집에 오자마자 엄마 쭈쭈가 먹고 싶다고 깐죽거린다면 나라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아들의 양 볼기짝을 만지작거릴 거다. 아들이니 귀엽기는 하니까. 하지만 그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숙제나 하라는 말을 할 거다.
내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결혼하기 한참 전이었는데 그때는 솔직히 어딘가 징그럽다고까지 생각했다. 애써 인체의 신비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 정도라고 생각하고 듣고 흘렸다.
나도 두 아이를 1년간 꼬박 모유수유를 하고 나니 이 이야기가 다시 생각이 났다. 특히 초보 엄마로 난관 봉착의 연속이던 첫째 모유수유는 애증 그 자체였다. 8년이나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그 감정은 고스란히 그러하다. 그 시절 나혜석이 <모 된 감상기> 수필에 쓴 문장인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먹는 악마다. “라는 말에 심히 공감했으니.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강렬한 것만 꽂히다보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왜곡되기 쉽다. 알고 보니 그 수필의 그 유명한 문장 이후에 쓴 문장들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다 적고 보니 5000자가 훌쩍 넘어가 끊어서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량 때문에 의도치 않게 연재라는 걸 해보게 되다니. 누가 읽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 다음 편 확인
https://brunch.co.kr/@naaaong/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