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욕망의 인정 : 남미새로 살아남기
남미새 페미의 섹슈얼리티 탐구 칼럼 #3
여미새, 남미새 콘텐츠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연애를 불매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연애를 포기하는 세상인데도, 해가 지면 헌팅포차 줄은 여전히 길고 데이트 어플 이용자 수는 갈수록 늘어난다. 아직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다른 성별의 누군가를 만나고 가까워지고 얽히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다는 거다. 성별 간 갈등이 커진다고는 하나, 동시에 끊임없이 서로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세상이다. 남의 일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내 이야기다.
‘돈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실 돈에 미쳐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테다. 나는 겉으로는 오랫동안 남자에 초연한 척, 쿨한 척, 관심 없는 척했지만, 사실 정말 많이 의식하고 살아왔다. 여성들만 있을 때의 내 모습과 무리에 남성이 한 명이라고 껴있을 때 (심지어 그 남성이 전혀 내 취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태도는 은밀하게 달라진다. 나도 이런 내가 싫고 외면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나는 남자에 미쳐있는 나 자신을 인지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남자들 눈에 너무 싸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비싸 보이지도 않는 적정 선을 찾아 행동해왔다. '예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정한 모습과 '말 걸어볼만 하다' 싶을 정도로 편안한 언행을 함께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말투와 성격 뿐 아니라, 외모와 옷, 그리고 지성과 경제력까지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활용했다.
덕분에 나는 친구의 지인들의 소개 요청도 여러 번 받았고, 길이나 카페, 술집에서 내게 연락처를 묻는 남자들도 봐왔다. 대단한 미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스무 살부터 끊임없이 데이트와 연애를 하며 지냈다. 20대에 연애를 가장 오래 쉰 기간이 반년 정도인데, 틈틈이 연애를 쉬었던 기간을 다 합쳐도 1년이 겨우 나올 것 같다. 개월 수로 대충 따져도, 10년 동안 9년 동안은 연애를 하고 지낸 거다.
계속 연애를 해온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솔로일 때 나 스스로가 너무 싫다는 점도 한몫한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헤테로 남자 지인들을 모두 무의식적으로 그룹화하여 생각하게 된다. 그 어떤 성애적 감정을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찐 친구, 찐 동료, 찐 선후배 존’부터, 만날 확률은 정말 낮지만 나에게 관심 있다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그냥 친구, 그냥 지인 존', 그리고 기회가 되고 상황이 맞고 서로 호감이 있다면 만나볼 생각이 있는 ‘관심 지인 존'으로 나누어진다. 연애하지 않는 기간 동안 이렇게 남성 지인들을 모두 '연애 가능성'으로 구별하고 다르게 대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글로 고백하고 나니 혼자인데도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그래도 요즘 나오는 연애 이야기 콘텐츠에 '위장 남사친'과 같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가 남미새라고 인정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페미니즘을 알기 전부터, 그리고 남미새라는 단어가 있기 전부터 나는 어느 정도 남자에 미쳐있었지만, 그런 나의 욕망을 인정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늘 어느 정도 모른 척하고, 아닌 척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욕망당하기를 기다리며, 순진무구한 채로 있어야 한다는 ‘순결 이데올로기’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렇게 섹슈얼리티 글을 연재하고 있지만, 보수적인 집안에서 K-장녀로 자라난 나는 스스로의 성적 욕망을 오래 미워하고 부끄러워했다.
역설적으로 페미니스트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남미새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이면서 남미새인 게 모순적이라고 느껴지는 때도 있었지만, 내가 나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고 언어화할 수 있게 도와준 것 역시 페미니즘이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성적 억압과 순결 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제에서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도, 여성이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온 게 차별과 여성혐오 때문이라는 것도, 모두 여성학을 배우며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때 탈코르셋과 비섹스 운동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의 성적 욕망과 섹슈얼리티를 긍정하고 가시화하는 여러 인물과 콘텐츠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성 섹스 칼럼니스트와 야한 만화를 그리는 여성 작가, 그리고 연애와 섹스를 이야기하는 토크쇼에 출연하는 여성 연예인도 나타났다. 페미니즘의 뜨거운 불길 속에서 전에 없던 여성의 연애와 섹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여성혐오로 인한 낙인과 차별의 문제도 있지만, 실질적인 안전의 문제도 연결되어있다. 여성이 섣불리 성적 욕망을 표현했다가는 성폭력을 경험한 순간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게 된다. ‘사실 너도 원한 거 아냐? 남자 좋아한다며’ 하는 의심을 받는 거다. 같이 찍은 셀카, 만나자는 연락, 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의 초대에 응했다는 이유를 근거로 성폭력 피해자들은 ‘무고가 아니냐’는 질문을 들어야 하는 세상이다.
과연 남미새라고 불리던 여성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법과 제도, 여론은 그 여성을 믿어줄까? 그러게 왜, 로 시작하는 질책으로 여성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지는 않을까?
남미새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인지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며,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성범죄의 타겟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을 위한 여성의원 치료나 검사 비용도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책정되어야 하고, 낙태죄 폐지 후 몇 년 간 제자리걸음인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 법과 제도, 연구와 지원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수많은 조건이 떠오르지만, 결국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는 성평등한 사회가 오면 남미새도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남미새’랑 ‘페미니스트’는 서로 모순되는 정체성 충돌이 아니라, 같은 세상을 꿈꾸고 있는 아군일 수밖에 없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남미새 페미' 3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