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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나 Sep 18. 2024

5. 욕망과 안전 : 그 많던 가해자들은 모두 어디로

남미새 페미의 섹슈얼리티 탐구 칼럼 #5



친구들 10명이서 함께 여행을 가서 이야기를 하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있던 10명의 여성들이 모두 최소 1회 이상의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데, 그중 아무도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하지도 공론화하지도 못했다는 거다. 성희롱부터 성추행, 성폭행 등 모두 자신의 피해경험을 이야기했는데, 그 사건 중 그 무엇도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사과조차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평균을 내면 거의 인당 2-3회의 피해경험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최소 20-30명 이상의 성범죄자가 도망치거나 모른 체하거나 연을 끊는 방식으로 빠져나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어떤 폭력은 아주 어릴 때 일어났다. 미취학 아동 때 나는 옆집에 살던 사촌오빠에게 주기적으로 성폭력을 당했다. 게다가 피해자가 나 혼자도 아니었다. 이후에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 역시 그의 성폭력을 당했고, 나는 그 사실을 듣고 나서야 내 피해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말했더라면 추가적인 폭력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오랫동안 자책했다. 이후 일베나 오유 같은 남성 커뮤니티에서 설이나 추석마다 사촌 여동생의 몸을 만지거나 촬영해서 인증하는 놀이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가해자들을 모두 모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있고, 얼마나 많이 그 경험을 덮어가면서 살고 있을까.


또 어떤 폭력은 흔하게 일어났다. 중학생 때 학원에 가는 버스에서 내 치마 밑을 찍거나, 내가 계단을 오를 때 몰래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손이 벌벌 떨리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고 수업을 들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울며 이야기하니 다들 그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증거도 없고 누군지 일일이 알아낼 수도 없으니, 신고하거나 문제제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친구나 가족들 모두 ‘여자가 알아서 조심해야 할 일'이나 ‘운이 없어 당한 일' 정도로 치부했다.


‘엉만튀', ‘슴만튀'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수많은 남성 청소년이 여성의 몸을 몰래 만지고 도망쳤고, 우리는 이를 제대로 처벌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나 처벌을 요구하는 여성들에게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비싸게 구네' '역시 여자들은 예민해' 라며 2차 가해하기 일쑤였다. 오늘도 그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숨 막힐 때가 있다.


고등학생 때는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어떤 남자 선배가 나를 따라오며 말을 걸었는데, 분명하게 거절했는데도 계속 따라오니 무서워서 집에 가서 말했더니, ‘네가 평소에 걔한테 웃어준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이후 나는 학원을 옮겨야 했다. 스토킹 범죄 때문에 이사를 하거나 학원, 학교를 옮겨야 했던 친구들을 알고 있다. 제대로 된 대응이나 처벌 없이, 여성 피해자가 알아서 잘 대처해야 하는 상황을 여러 번 보면서 ‘이 국가는 여성을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 보고는 있는 건가?’ 생각마저 들었다. 범죄를 막기 위해 가해자 대신 피해자를 검열하는 사회에서, 범죄는 반복되고 여성들은 위축된다.


아주 친밀한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도 있었다. 연애 또는 연애 전 단계의 관계에서도 충분히 성범죄는 일어날 수 있었다. 피임을 하기로 합의하고 섹스를 하는 중에 일방적으로 피임기구를 없애거나, 하기 싫거나 그만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 힘으로 강제한다거나. 피해자 몸에 증거가 남지 않게 하기 위해 온몸을 구석구석 부드럽게 씻기고, 다정한 말로 사과하고 애원하는 경우도 있다. 카톡 등으로 서로 호감이 있다는 정황 증거가 남아있으니까 그 후로 어떤 일을 당해도 ‘성폭력일 수 없다’며 피해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회유와 애원과 협박을 동시에 하는 가해자를 보면서, 피해경험자는 우선 그 자리를 벗어나 안전해지기 위해 그에게 협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협조적으로 행동했던 태도는 다시 '무고'를 의심받게 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게다가 원하지 않는 성행위에도 몸은 물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여성의 성기는 외부 물질이 닿으면 물리적 충격과 병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액체를 내보낸다. 흔히 ‘흥분'의 결과로 알고 있어 ‘애액'이라고 불리는 액체다. 게다가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면 질 내부가 긴장할 수 있다. 실제로 성폭행을 당하는 중 오르가즘을 느끼는 사례도 있다. 그렇지만, 몸이 반응했다고 해서 그것이 폭력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여성들은 그 경험에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검열하며, 폭력을 폭력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된다.


그외에도 피해자가 신고를 못(안) 했던 이유는 너무 다양하다. ‘신고하고 재판하느라 드는 돈과 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다' ‘가해자가 너무 빠르게 도망갔다' ‘시험기간이었고 장학금 때문에 그런 데에 시간을 뺏길 수 없었다' ‘너무 괴로워서 잊고 싶었다' ‘증거가 없었다' ‘증거도 충분하고 너무 괴로워서 신고할까 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부모님이 너무 놀라실 것 같았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내가 더러워진 기분이었다' ‘신고해 봤자 나에게만 흠일 것 같았다' ‘동의하지 않은 섹스를 강요당했다는 게 부끄럽고, 화가 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신고당하지 않은 수많은 남성 가해자들이 우리 사회에 함께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성폭력을 저지른 것조차 모른 채 좋은 아들, 좋은 동료, 좋은 오빠, 좋은 아빠로 여기면서 살아갈 거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소름 끼쳤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그런 식으로 빠져나갔을까?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신고하지 않고 넘어가고 있을까? 내가 좋아하게 된 그 남자가 단 한 번의 성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대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모두가 존경하던 남정치인, 남작가, 남프로듀서, 남전문가들이 가해자로 지목당했던 여러 미투운동을 떠올려보면, 인성과 지성, 학벌, 재력 등 그 어떤 조건도 남성이 성폭력 가해자가 아님을 담보하지 않는데...


성 경험과 폭력, 섹슈얼리티와 안전, 신체에 대한 인식과 신체를 침해당한 경험은 모두 딱 붙어있는 문제다. 이런 의심과 불안, 트라우마 속에서 남성을 믿고 좋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근데 그 어려운 일을 나는 해 버리고 말았다. 이거야말로 내가 남미새라는 증거가 아닐까? 이렇게 남성에 의한 성폭력이 흔한 사회에서 또 남자를 믿고 만나는 것,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로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하는 여성들이 나 말고도 많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다 보면, 이 세상은 사실 ‘남미새 월드’가 아닐까? 수많은 남미새들의 욕망과 안전을 위해 우리 사회가 더욱 성폭력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뻔하지만 이루어지기 어려운 염원을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해본다.




‘남미새 페미’ 5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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