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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생의 조건

by 마음돌봄

90년대의 성공 조건은 무엇인가.

좋은 성적이면 끝난다.

난 그런 90년대에 나름 맞는 아이였다.

그 시절 중학교 선생님들은 여자 선생님들은 당직을 남자 선생님들은 숙직 업무를 섰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선생님이셨던 막내 이모를 따라 교무실로 가면 창문으로 노란색이 살포시 물든 주황의 나뭇잎들이 흩날렸다.









편안한 분위기에서의 공부는 안정감을 줬다.

그건 아마도 당시에 흔하지 않게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어주시던 막내 이모 덕분이 아닌가 싶다.

동영상 플랫폼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 나는 일하시는 이 모 옆에서 중간고사 예상문제나 기말고사 예상문제를 만들었다.

컴퓨터도 그리 흔하지 않아서 연습장에 열심히 예상 문제를 만들었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늘 일등 하는 아이라는 수식어를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매달 1일이 되면 '이달학습'과 '세광음악교실' 문제집을 사들고 와서 열심히 읽고 풀었다.

빳빳한 새 교재에 사각사각 연필로 써 내려가던 답안들이 정답을 외칠 때면 꽤나 마음이 흡족했다.

'표준 전과'를 살까 '동아 전과'를 살까 고민하던 순간은 '빨간 휴지 줄까 아니면 파란 휴지 줄까'처럼

심장 쫀득한 시간이었다.

전과를 펼치고 페이지 한쪽 귀퉁이의 자잘한 글씨까지 열심히 읽어나갔다.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면서 연필로 열심히 줄을 그어댔고, 줄을 여러 번 그을 때마다 머릿속에 지식이 쌓이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그땐 책을 많이 읽는다기 보다는 문제집을 풀고 시험 문제를 맞히는걸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물론 책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어릴 때 동화책을 읽어주셨던 엄마의 영향 덕분인지 책이 익숙한 아이로 자라고는 있었으니까.

가장 마음속에 남는 책은 외갓집에 가면 항상 읽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거인의 정원'이었다.

초록색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주황색의 '거인의 정원'을 읽으면 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외갓집이라는 어감, 많은 이모들과 삼촌. 그리고 우리 집엔 없었던 침대가 있던 곳.










"OO는 이번 시험도 잘 봤다면서? 아빠 입이 귀에 걸리셨더라."










아빠는 다소 가부장적이셨는데, 큰딸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에는 굉장히 기뻐하시는 분이었다.

주변엔 당신 딸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나있었다.

마냥 편하기만 하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갔다.

교복을 입음과 동시에 뭔가 어색해진 일상이 몰려왔다.

여러 국민학교에서 모인 친구들은 이전 친구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 말은 내가 공부 잘했던 건 그냥 우물 안 개구리 느낌이라는 것이다.

책을 씹어먹는 건지 갈아먹는 건지 평균 점수가 94,95점을 육박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벽이 느껴졌다.

(당시는 100점 만점의 시대이고, 반등수와 전교 등수가 교실 벽 뒤에 붙여지던 시절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심지어 전학 온 친구조차 전교권 무리에 속할 만큼의 점수를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부반장이었던 나는 10등 안에 들어가기도 빠듯했는데, 도대체 그 아이들은 어떻게 그런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첫 중간고사에 95점 평균으로 일등을 한 우리 반 대의원은 손톱을 어지간히도 깎지 않는 친구였는데, 삼손이 머리카락을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길게 자란 손톱을 절대로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깎지 않았다.

마치 그 손톱들 속에 애써 공부한 지식이 다 들어가 있는 것처럼.

나중에 이 지역 의대를 간 반장은 크게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머리는 언제나 더벅머리였지만 몸이 많이 말랐고, 얼굴이 작았다.

그러고 보니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머리가 작거나, 몸이 날씬하거나, 그마저도 아니라며 피부가 도자기처럼 좋았다. 운도 잘 따라줬는데,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벌써 몇십 년은 지난 일이나 과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과학 시간이었나.

생물 교과 부분을 수업하셔야 하는 선생님이 갑자기 다른 단원으로 바꿔서 수업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름 열심히 예습한 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고, 생물 교과를 준비하지 않았던 더벅머리 반장은 선생님이 그날 바꾸신 그 부분을 공부했던 터라 운이 좋다며 연신 방긋거렸다. 이야, 이런 것마저 운이 따르는구나. 난년일세.









공부 여신들의 계보는 그 이후로도 착실히 이어졌다.

특히 눈이 이국적인 느낌으로 큰 친구들이 공부를 잘했으며, 대부분 그런 외모의 친구들의 이름은 '한나'였다. 김한나, 위한나, 3반에 김한나, 6반의 정한나.

하늘이 점지한 것인지 그것이 운명이라면 나중에 딸을 낳으면 무조건 '한나'라고 지으리라 감히 유전자를 무시하며 결심했더랬다.

그즈음 딱 한번 내가 서울대를 갈 능력을 보인적이 있다.(우하하하.)

당시 중학교 사회 선생님은 인자하신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다.











"얘들아, 이성이란 무엇이냐?"
"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너, 서울대 가겠다."
에??









갑자기 어디서 들어서 떠오른 것인지 난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반에서 유일하게.

서울대를 가겠다는 선생님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 난 명문대 욕심 있는 아이였구나.

그 후로 공부법 책이란 책은 다 읽어보고, 당시 유행하던 하버드 합격생 수기 겸 에세이집도 많이 읽었다.

심지어 특목고 학생들이 주인공인 소설도 열심히 읽었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더벅머리 반장처럼 머리를 잘 안 감아야 공부했던 게 안 빠져나가나?

아님 1학년 때 우리 반 대의원처럼 손톱을 길러야 했나.

이미 몸매나 얼굴 크기는 텄고, 이도 저도 안되면 이름이라도 '한나'로 바꿔야 하나. 내 성에 붙이면 너무 개그 느낌인데.


결국 '공부법'만 보던 나는 그저 그런 성적의 소유자가 되었다.

마치 책만 읽고 실천을 안 하는 게 태반인 사람들처럼.

공부 잘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함과 동시에 질투하고

한편으론 그들과 추억을 만들며 성장했다.

고3 그동안 그리 높지 않았던 모의고사 점수를 보며 이미 한국외대는 물 건너갔구나 생각하고

교대나 사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꿈도 야무지네.)

그때 IMF 가 터졌다.(이건 터진 거야, 터진 거.)

교대나 사대는 이미 반 일등들이 가는 학교가 되었다.

눈웃음이 배우 안은진만큼이나 예쁘던 고3 때 반장은 서울교대 00학번이 되었고, 중학교 1학년 때 반장은

지방의대 00학번이 되었다.










'00학번 = 산소 학번'을 포기할 수 없던(도대체 그게 뭔데 포기를 안 해?) 나는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갔다.

90년대는 학력고사 점수나 수능 점수가 높으면 좋은 대학을 가던 시절이다.

오로지 공부만 잘하면 되는 시절.

한 번 뒤틀려버린 수능 점수는 끝없는 진로 고민에 대학 내내 빠트렸지만, 그러면서도 알량한 대학생의 캠퍼스를 느끼고 싶었던 나는 재수(NO N수생) 없이 대학을 갔다.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나 미드 '프렌즈' 혹은 어릴 때 수요일마다 보던 '내일은 사랑'을 꿈꾸면서.

내가 대학을 선택한 순간 다른 카테고리의 친구들은 공무원 시험을 선택했다, 스무 살 나이에.

영어, 한국사, 국어 등을 공부하는 그녀들을 보며 저 공부 지겹지도 않나 생각했지만, 몇 년 후 대학 중앙도서관에서 공무원 9급 시험을 준비하는 선배들을 보며 그때 그녀들이 차라리 현명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사회 선생님의 '너 서울대 가겠다.'

뭘 보고 그러신 건가요, 쓰앵님.

정확한 용어 이해.

명확한 설명.

어쩌다 얻어걸린 국어사전 보는 아이 같은 느낌이었나요.










이제는 사전만 보며 대답 잘하면 되는 학생은 아니지만, 여전히 정확히 파악할 것은 남아있다.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민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싫어하나,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여전히 고민하지만 답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야 한다.

피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20대에 했었을, 하지만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그 고민의 해답은 평생 온몸에 치렁치렁 달려있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나'라는 과목의 우등생이었어야 했다.

단편적인 느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재미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빨리 치열하게 '나'를 파헤쳤어야 했다. 대학생이 되어도 직장인이 되어도, 엄마가 되어도, 그냥 사람으로 살아도, 늘 고민의 정점이자 해결책의 최고봉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꾸 그 질문을 피한다면 계속 나를 따라다니리라.

스쿠루지를 찾아온 말리의 망령처럼 갑자기 꿈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려나.










이제는 '나'에 대한 예상 문제를 만들어보자.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전에 단원 평가까지 해보자.

수행 평가까지 해서 서술형으로 적어본다면 더욱 좋겠지.

일등을 해야 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치열하게 열심히 해보는 경험.

그 안에서 나만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답을 찾는 사람은 그 답을 절대 피할 수 없다.

온고지신의 계절, 셀프 탐구 영역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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