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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은밀한 '속'사정

by 마음돌봄

혹자는 '그' 유전자가 없다고 하고, 다른 이는 '그' 기술을 배우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바로 그것은, 정리 능력이다.

곧 이사 가는 동생의 급한 연락에 짐 정리를 하러 갔다.

2주 연속 주말에 타 지역을 다녀온 뒤였다.

언제나 도움이 필요할 때 항상 곁에 있어주던 동생이기에 쉬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동생 집으로 향했다.

냉장고 정리를 하자라는 분명한 목표를 간직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냉동실엔 잘 소분된 생강 큐브와 마늘.

글루텐 프리 밀가루와 호박 가루, 들깨 가루까지 내게 헬로를 외치고 있었다.

지난달 준 갈비와 건조오징어는 처음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누워 있었다.

국물 멸치도 대량으로 샀는지 언니가 가져가라고 한다.



darrien-staton-ZUhM8LE_HGc-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Darrien Staton



냉장고를 열었더니 이건 두 사람분의 반찬이 아니다.

파김치, 배추김치, 각종 향신료와 소스까지 빽빽이 차있다.

엄마가 보내주신 반찬과 꾸지뽕 즙까지 더 이상 넣을 틈이 없다.

둘이 먹어봤자 좀처럼 줄지 않는 양념이 눈에 뻔히 보였다.

대용량 채소와 어제 산 파인애플까지 있었고, 빠르게 가져갈 것은 따로 담고 나머지 버릴 것은 버렸다.

냉장고에만 들어가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초보 주부에게 냉장고를 믿지 말라는 묵직한 조언을 날렸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종이, 캔, 병, 비닐 등의 각종 재활용 쓰레기까지 세이 굿바이를 외쳤더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내 동생이 분명하구나. 이건 아무리 봐도 유전자와 기술 없음의 콜라보이다.

대강 정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평소 알고 지내는 동네 엄마가 생각났다.

그녀의 남편은 태생부터 정리왕인데,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일랜드 식탁엔 꽃병 하나에 꽃 한 송이만 있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남편이 옷정리며 물건 정리까지 칼 같은 사람이라 본인도 많이 노력한다고 했다.


그녀나 나나 노력해서 정리하는 사람들이다.

신혼 초엔 청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했는데, 이렇게 청소만 하고 살림만 하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잡지 속 집처럼 예쁘게 꾸미고 살고 싶으면서도, 잘 정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곤 했다.

결혼을 하고 내 살림을 차렸으니, 이제는 이런 것쯤은 너끈히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가끔은 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청결의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의 '일'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면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결혼 전엔 분명 나를 위한 시간을 살았는데 오롯이 남을 위해 사는 기분이랄까.








시간이 흐르면서 세운 원칙은 일단 6개월에 한 번은 버리자이다.

사실 그런 계획이 아니더라도 매일매일 쓰레기를 정리하고 청소를 한다.

사람의 몸이란 어떤 것이기에 이리도 많은 쓰레기를 양산하나 싶다가도 매일의 청소에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정리된 집을 원하면서도 몸은 힘들고 싶지 않은 이 아이러니의 향연.


그러면서도 깨달은 건 분명히 있다.

작은 방 하나, 내 집 하나 정리를 못한다면 결국 그 어떤 것도 정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득 찬 메일함.

복잡한 가방 속.

수납장에 아무렇게나 쌓인 접시들.

언제 생긴 지 모르는 종이컵과 나무젓가락들.

그새 늘어난 카톡과 문자들.

잘 정리하지 않으면 인생도 정리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미니멀리즘이나 비움의 미학이 요즘 들어 더 돋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최소한의 물건만 있어도 살아내는 게 인간이니까.

오히려 그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창의력을 발휘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무작정 사고 싶은 소비 욕구가 올라올 때면 밀리의 서재를 열어 검색을 해본다.

아니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마저도 온라인 서재에 책을 많이 쌓아놓거나,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 쌓여있어도 마음이 무겁다.

정말 소장가치가 있는 책만 사겠다는 결심.

읽은 책을 다시 반복해서 읽겠다는 결심으로 애써 억누르는 마음은 나를 위한 작은 훈련이다.


nick-hillier-m5wga7Q2PNw-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Nick Hillier


거기다 동생네 냉장고와 집을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나 그때 그때 정리해 보자.

무작정 쟁이지 말자.

먹을 만큼만 구입하자, 뭐 이런 생각들이다.

과거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어쩌면 현재 진행형일 수도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양쪽 어머니가 생각났고

동생의 미안해하는 얼굴도 계속 떠올랐다.

가져온 반찬과 각종 식재료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또 한 번 '정리'와 '비움'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거창한 환경 보호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식은 하고 살기로, 아이들에게 이부자리 정리가 기본이다. 침대부터 정리하라,라고 말하는 것을 난 자신에게도 계속 말하기로 말이다.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강조하는 나에게 맞춰 우리 집안 남자들이 열심히 노력해주고 있지만

정리의 여신인 지인 작가님의 말처럼 습관이 되기 위해, 가족들에게 또 나에게 연신 말해줄 생각이다.








일단, 내 주변부터 정리하자.

내가 일어난 자리는 아무도 앉지 않았던 것처럼 하자.


평생 나에게 '정리'란 힘든 작업일 수 있지만 포기는 하지 않겠다.

가벼워질 나의 마음을 위해서라도.

매일매일 작은 성공을 반복할 생각이다.

내일은 쌓인 자료 더미를 과감히 정리할 것.

그리고 더 이상 잘 정리 못하는 자신을 채근하는 마음은 '정리' 할 것.


priscilla-du-preez-tQagUWpAx5k-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Priscilla Du Pree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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