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남의 신발을 신어봤는가.
남의 신발을 신어본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창 영어 속담을 공부할 때 재미를 느끼고 감탄해 마지않았던 때가 있었다.
'Put yourself in someone else's shoes.'
남의 신발을 신어봐야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표현이 기가 막히게 절묘하다고 느꼈다.
나 아닌 사람에게 공감하고 이해하고, 그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며 배려하는 것.
언제부터인가 굉장히 무미건조해진 나란 사람이 한 때 공감을 참 잘했다는 사실이 희미하게 생각되었다.
사실 여전히 공감의 여왕이라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래, 내가 좀 무채색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올해 인스타와 블로그를 쓰면서 최대한 시간을 덜 들이는 방향으로 심플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심플하게(사실은 건조하게)를 외쳤지 않았던가. 그래도 올 한 해를 돌아보면 2024 키워드에 맞게 어느 정도 살아왔다. '끈기' 그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서. 내년을 기다리며 나에게 다가온 단어는 바로 '공감'이다. 지난 금요일 글쓰기 모임에서 짝을 지어 인터뷰를 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말이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 계속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 목표 중 하나를 '소설 쓰기 공부와 단편 소설 완성하기'로 정했는데 내게 부족한 것이 공감능력이라는 사실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정말 공감하고 배려하기는 내가 친구들 중에 참 괜찮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마른오징어처럼 감정이 바싹 말라버린 걸까. 마흔이 넘어 글을 쓰면서 그나마 멈춰있던 감정의 근육을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중인데 좀체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농담을 하고 까불어봐도 오뚝이처럼 다시 감정의 늪으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드라마며 소설은 어차피 현실이 아니잖아를 부르짖으며 보지 않았는데, 다시 소설을 읽고 있다. 드라마는 아직 모르겠다. 30대 때만 해도 오매불망 기다리던 드라마도 있었는데, 미드, 중드, 일드 가리지 않고 다 섭렵하던 나인데. 아직 드라마는 나에게 먼 나라 이야기다. 차라리 드라마 대본집을 읽는 것이 나을 지경이다. 하, 치명타다. 소설을 써보겠다고 야심 차게 결론을 내렸건만 인생에, 세상에, 공감을 못하는 사람이 소설을 과연 쓸 수 있을 것인가. 최근 글모임에서 사 온 '김호연의 작업실'을 읽고 있다. 이 작가님은 참 본인의 소설만큼이나 정보서도 재미있게 잘 쓰신다. 출판사에서 일하신 경험부터 작품집필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그 와중에 '난 출판사 일한 경험도 없잖아. 소설 쓰기 틀린 건가.' 뭐 이런 영양가 없는 생각부터 하는 나 자신을 보니 아직 멀었다 싶다. 절반 정도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아, 소설 쓰기가 이런 작업이구나. 알면 알수록 힘든 일이구나'이다. 와중 내 눈을 사로잡는 페이지.
역시 그런 거였다. 가장 취약점인 '공감'. 이건 무조건적인 배려와는 결이 확실히 다르다.
마치 로봇처럼 변한 감정을 시급히 구원해야 한다.
요즘은 AI도 감사하다고 인사하면 자기가 고맙다며 언제든 질문해주라고 다정한 말을 하는 세상인데 난 인간이 아니던가. 최근 조국의 내란 문제로 스트레스가 심한 걸 보면 이것도 공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의 아픈 이면에, 타인의 고통에, 일련의 상황들에 난 얼마나 공감하고 살고 있을까. 마치 숙명처럼 다가온 이 단어를 2025년 키워드로 삼아보려 한다. 이건 절대 소설을 써서 한 대거리 출세해 보겠다는 야심때문만이 아니다. 가뭄이 든 땅처럼 버썩하게 말라버린 내 마음을 돌보고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잘살아보세, 이 다섯 글자 때문이다. 인. 간. 답.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