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별빛 흐르는 다리를 건너.
내가 어릴 때는 주택에 사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아파트라 하면 주로 5층짜리나 단층짜리 아파트가 많았는데, 네가 장담하냐고 묻느냐면 확실히 예스라고 할 수는 없다. 전국을 다녀본 것도 아니고 앞서가는 국제도시 서울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주변은 골목길마다 자리 잡은 집들이 옹기종기 있는 동네였고, 이층엔 세를 주고 일층에서 살았는데 마당도 있고 화단에 꽃도 있는 그런 집이었다. 학원을 다녀오면 동네 아이들끼리 우르르 모여서 이것저것을 하며 신나게 놀다가 들어와서 저녁을 먹으라는 말에 하나둘씩 헤어지던 저녁, 해가 노랗고 붉게 넘어가던 시간이 있었던 그런 곳이었다. 아파트에 살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 18층 정도 되는 높이의 아파트였고, 시의원에 출마한 이웃아저씨가 살던 곳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곳에서 혼자 우뚝 서있던 그런 아파트였다.
그땐 아파트가 재테크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도 몰랐고, 좀 편한 집이구나 느꼈던 복도식 아파트. 친구도 살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같이 살았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여러 형태의 아파트를 경험한 후 가정을 꾸린 지금도 아파트에 살고 있다. 월세인지 관리비인지 모를 돈을 매달 지불하며 편하고 익숙한 이유로 계속 살고 있는 나의 주거 공간. 신도시에 이사 오면서 기존의 아파트와는 다르게 편리한 시스템, 아파트 도서관, 헬스장, 독서실, 골프장과 여러 편의 시설들. 다 누리고 살려면 애써 시간을 내야 하고, 잠에 취한 몸을 이끌고 가야 하는 곳들이다. 쓰레기 수거장에서 눈이 오는 새벽 열심히 눈을 퍼내는 경비원 분들을 보며 인사를 하는데 정말 책에 나온 곳처럼 그분들을 하대하는 곳이 있을까 싶다가 몇 년 전 옆 아파트에서 아파트 소장님이 관두신 일화가 생각났다. 아들뻘 되는 입주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라는 이야기, 주차를 엉망으로 해놓고 되려 반말을 했더라는 그런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의를 지키지 않는 낯부끄러운 이야기들.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고 아파트로 흥하고 망한 자(망한 자는 별로 없으려나)가 많은 나라이다. 집이라는 존재에 대한 갈망이 그 어디보다 강한 나라이니. 이사를 여러 번 하며 재산을 불리는 재주도 없는 나는 그저 어쩌다 한 번 했던 이사에 한 달을 낑낑대며 다시는 이사 따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느 지역이나 그곳의 '강남'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주류에 끼지 못한 사람은 나름의 철학으로 살아갈 뿐, 사실 살다 보면 그런 것 없이 사는 게 바쁘기도 하지만.
대학교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때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던 동기가 갑자기 생각났다. 선배가 시켜서 무작정 부른 그 노래는 꽤나 잘 불러서 분위기가 업 되었더랬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그리운 마음에 전화를 하면 아름다운 너의 목소리
언제나 내게 언제나 내게 속삭이던 너의 목소리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 머물지 못해 떠나가버린
너를 못 잊어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오래전 주공아파트 아이들이 자기 집도 아닌데 바닥 분수에 와서 논다며 말하는 경비원 아저씨가 생각났다. 관리비를 안 냈기 때문에 혹은 이 아파트 단지에 대한 권리가 없어서 그런 건가? 여름 잠깐 오후에 바닥 분수에서 물놀이하는 데는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주공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되나. 소위 건설사의 브랜드 네임이 있는 아파트에 살아야 하나. 그런 것 없이 그냥 다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같이 놀면 안 되는 건가? 아파트란 도대체 무엇인가. 청약, 계약금, 중도금, 완납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 자격의 완성인 것인가. 수많은 물음표를 뒤로 한 채 아무 말도 못 했던 나는 그저 그런 어른이었다. 저 아이들이 왜 오면 안돼요?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는데. 몇 달 뒤에 여기 주민이 될 수도 있어요.
자녀가 초등 고학년이 되면 이 동네에서 이사 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학원이 많은 지역으로. 난 그저 이곳에 머물 뿐이다. 아무 이유도 없다. 여러 번의 이사로 찬란한 재테크를 할 요령이나 지혜도, 학원을 알아보며 공부에 열의를 불태울 마음도 좀처럼 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며 그저 귀차니즘에 의해서 혹은 익숙함에 취해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일 당장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 아직은 인생의 시간이 그곳에 있지 않은 것뿐이다. 대출금을 열심히 갚으며 0이 되는 순간을 다시 기다릴 뿐이다. 첫 아파트 대출금이 0이 되던 날 다시금 몇 억의 대출금을 껴안으며 다시 시작한 레이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땐 또 다른 무언가를 갖게 될까? 아마 지금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 확실하다.
2030 영끌족, 수도권 아파트 매수세 심상찮아'라는 기사가 떠 있었다. 아영은 기사에 나열된 30대의 사례들이 무척 낯설었다. 너무 다른 세상 이야기라 오히려 황당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끌어모으면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영혼은 대체 어떤 영혼일까. 나는 영혼마저도 실속이 없네. 웃음이 나왔는데 솔직히 웃기지는 않았다. p.241
그래, 관심 없어 보이긴 하더라. 근데 나는요, 집이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우리가 종일 밖에서 얼마나 시달려? 그렇게 젖은 신문지 꼴로 집에 들어왔을 때, 이야, 이제 살 것 같다, 소리가 나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집이 크건 작건 간에, 자가건 전세건 간에. 나는 우리 손님들한테 그런 집 찾아주고 싶어요. p.188
사실 알고 있다. 난이 언니 같은 사람들을 안다. 성실하고 다정하고 선량한 사람들, 씩씩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사람들. 남들 눈에는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자기 세계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사람들. 작은 기쁨을 알고 큰 슬픔에도 담대한 사람들. 조금만, 아주 조금만. 혼자 설 수 있을 만큼만 기회를 주고 응원해주면 소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끝까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을 사람들.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