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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 Jul 03. 2023

사실 1등 하고 싶었어.

내가 '수린이'인 이유




"기록 재기 싫으신 분들은 안 재셔도 돼요~ 결석하지 마세요!"



 매월 마지막 수업일은 생존수영으로 진행된다. 화목반 강사님은 생존 수영을 가르쳐 주신 후에 회원들의 50m 수영 기록을 잰다. 기록을 재고 싶지 않은 분은 기록을 재지 않아도 되지만 똑같이 스타트해서 한 바퀴는 돌고 오셔야 한다고 말해놓고 기어코 몰래 기록을 재신다. 몇 개월 반복된 강사님의 선의의 거짓말에 회원들 모두는 알지만 모르는 척 속아 넘어가준다.



 우리 반은 수력 25년 차부터 1년 미만의 나까지(어릴 때 빼고), 다양한 수영 역사를 가지신 분들이 함께 운동하고 있다. 이제 막 상급반에 올라온 20대 동생부터 60대 언니를 포함하여 20명의 회원들이 2개의 레인에 나뉘어 수영한다. 중급에서 막 올라온 회원들이 거쳐야 하는 3 레인, 수영에 미쳐있는 4 레인. 나는 4 레인 막내를 담당하고 있다.   



 목요일에 자유형 50m 기록을 잴 거라는 강사님의 선전포고가 있은 후부터 수시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출발 신호에 맞추어 스타트 자세를 취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생각만으로도 심박수가 올라갔다. 기분 좋은 떨림이라기엔 너무나 긴장되고, 그렇다고 도망치고 싶은 긴장감은 아닌. 묘하다.



  상반기 내내 수영만 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영 갈 준비 하고, 수영하고 나와서는 수친들과 수영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수영을 더 잘할 수 있을지 밤에도 공부했으니, 수영만 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작년 늦가을,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다시 수영을 시작하며 강사님이 50m 자유형 기록을 재어 주셨다.

아마도 수영장에 다닌 지 4번의 수업만에 재었을 기록.

그리고 한 달 후 11월 마지막 수업일의 기록.



 그 후에 자유형 50m 기록을 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기록을 재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작년에 처음 수영을 시작할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일단 체력부터가 다르다. 몸무게도 3kg 감량되었고 수영할 때 쓰는 근육들도 많이 단련되었다. 3월부터는 매일 강습을 받고 있기도 하다. 내 수영 실력이 얼마나 늘었을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물론 25m 지점에서 턴을 하다가 실수를 하거나 과호흡 혹은 체력안배 실패로 마지막에 퍼져버리면 좋은 기록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운동이 그렇긴 하겠지만, 수영은 하면서 생각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유선형을 유지해야 하고, 스트로크와 킥이 딱딱 맞아서 저항이 없어야 하고, 스타트를 하자마자 잠영으로 돌핀킥을 차는 속도와 거리, 호흡의 횟수, 25m 지점에서의 퀵턴,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 피니쉬 태그까지. 수영도 결국 기록 싸움이다.

 


 수력이 오래되신 분들도 '내가 30대 때는 말이야'하며 젊은 시절에 당신이 얼마나 물속에서 날아다녔는지를 이야기하신다. 물론 기록에는 관심 없이, 얼마나 쉬지 않고 자유형 뺑뺑이를 돌 수 있냐로 자랑하시는 분도 계시긴 하다. 어쨌든, 상급반이기에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은 모두가 같다. 그래서 기록측정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한다.






 좋은 컨디션이길 바랐지만, 긴장한 탓인지 자다가도 몇 번 깼고 아침 알람 소리도 듣기 전에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주었다. 기록 단축을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적당히 할까 그냥.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변명만 혼자 늘어놓았다.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수영장에서 회원들끼리 단순하게 기록재는 날인데 이렇게 떨릴 일인가. 새가슴인 내가 너무 웃기다.




 삐!

 호루라기 소리에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스타트를 뛰었다. 잠영을 하다가 스트로크를 시작하면서 보니 옆레인에서 같이 출발한 20대 젊은 여인이 바짝 따라오는 게 보였다. 아무리 20대라도 이제 막 중급반 딱지를 뗀 친구보다는 빨라야 하지 않을까. 더 빨리 더 빨리. 퀵턴을 하고 제대로 벽을 밀지 못해 살짝 미끄러졌다. 그래도 질 수 없다. 더 빨리. 더 빨리. 킥킥킥킥. 캐치 푸시 캐치 푸시. 팔은 쉴 새 없이 돌아갔고 다리도 모터 달린 듯 쉬지 않고 찼다.



"39초!!"



 소수점까지 39.44의 기록으로 자유형이 주종목인 왕언니의 기록도 제쳐버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팔도 후들거려 겨우 물 로 나왔다.


"끝까지 자세 유지하고 잘했어요! 회원님은 대회도 같이 나가고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수영강사님의 칭찬까지 이어지니 만족감이 엄청나다. 와. 나 수영 쫌 하는구나. 나이가 어린 편이긴 해도, 아줌마인데. 나이 40을 앞두고 돌고 돌아 이제야 잘하는 일을 찾은 걸까.



 그날의 주인공은 단연 나였다. 막내이긴 해도 수영을 배운 기간은 제일 짧기 때문에 모두가 인정해 주고 축하해 주었다. 왕언니가 "이제 나는 1등은 못하겠네. 나는 점점 느려질 거고 얘는 점점 빨라질 거 아니야~"라며 나에게 뼈 있는 농담으로 일침을 가하시긴 했지만 몇 개월간 멘털 훈련을 한 덕분인지 "제가 눈치도 없고, 죄송해요. 헤헤헤." 하며 바보처럼 웃고 넘겼다. 나도 조만간 20대 젊은 여인에게 따라 잡힐 테니 1등 할 수 있는 기회도 몇 번 없을 거다.



 그렇게 '수영이 재미있고 정말 더 잘하고 싶다'로 끝났다면 아름다웠을 이야기. 기록을 잰 날 밤, 자다가 종아리에 쥐가 났고 다음 날 수영 강습에서도 종아리와 발가락에 쥐가 났다. 이틀 후부터는 팔과 어깨가 아파오고, 오늘까지도 4일째 근육이 아파 결국 정형외과를 다녀왔다. 언니들이 기록을 잰다고 했을 때 왜 죽기 살기로 휘젓지 않고 적당히 수영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마흔을 앞둔 수린이는 수영장에서 성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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