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번째 공백
한평생 익숙해질 일 없던 것이, 이른 아침 집 밖을 나서자마자 ‘아… 또야?’ 싶어졌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눈이나 비가 많이 오는 편도 아니었고, 서울로 상경한 이후에도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과, 눈이 쌓일 법한 겨울이면 늘 본가로 내려가곤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또 미끄러지기 쉽겠군’, ‘오늘은 슬리퍼를 못 신고 다니겠구나’ 같은 부질없는 생각과 함께 우산을 펼치고 눈을 밟았다.
보드득, 부서지는 이 질감은 언제가 되어 녹아 사라질까. 아마도 그날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올 것이다. 겨울이 다 갔나 싶게 찾아왔던 초봄의 밤공기가 무색하도록 눈이 나리는가 하면, 코 끝이 서늘해지는 추위에 익숙해질 즘엔 풀냄새가 푸릇하게 돋아날 것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로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올 것이다.
봄, 봄이 되면 유달리 마음이 붕 뜨곤 한다. 설레는 연분홍빛들에 간질거려서가 아니라, 그 사랑스런 싱그러움 사이에서 나만큼은 다가올 당신의 그날을 손곱아 가기 때문이었다. 매일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때때로 눈이 부시게 찬란한 색들이 쏟아지는 황홀 속에서 나는 홀로 상복을 입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채색에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까, 아주 때로는 말이다.
이제 나는 대체로 봄의 따스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을 뿐이다. 다가오는 바람에 하나둘 저물어가는 꽃잎과 다를 바 없었다. 웃음이 멎으면 가끔씩 눈물이 맺히기도 하던가, 뺨을 타고 구르는 것이 아까워서 눈을 잘게 깜빡이면 바짝 말라버린 눈가가 따끔했다.
따끔, 따끔.
그러면 어느덧 다가와 있겠지.
봄. 완연한 봄. 만연하는 봄.
눈이 녹으면 이 봄에 나는 당신을 보러 갈까 보다.
멀리, 아주 멀리, 또 아주 가까이.
올봄에는 향이 짙은 꽃을 한 아름 담아 갈게.
당신의 곁을 다녀간 후에도
작은 품에서 꽃향기가 오래 남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