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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Aug 25. 2022

찰나 속에 영겁

카이로스의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

 페퍼민트 차를 마시며 삼국유사의 조신 설화를 생각했습니다.      


세규사의 중 조신은 태수 김흔의 딸에 반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하여 닿을 수 없습니다. 조신은 관음보살 앞에 기도하며 울다 잠이 듭니다. 꿈에서 그녀가 나타나 자신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둘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서 살게 됩니다. 둘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건만 조신 설화 내내 일절 언급이 없습니다. 바로 고통과 참혹입니다. 가난과 병마로 40년 세월이 지나갑니다. 동냥을 하며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몸을 의지할 집도 없습니다. 자식 하나는 굶어 죽고 다른 아이는 구걸을 하다 개에 물려 돌아옵니다. 아내는 조신에게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보며 상대를 그리워하는 것이 같이 있어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면서 헤어질 것을 종용합니다. 아내의 말에 조신은 흔쾌히 응하고 각자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조신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꿈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조신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삶과 사랑에 미련과 덧정조차 남지 않습니다. 조신은 저녁에서 새벽까지의 짧은 꿈을 통해 인생이 고통의 바다이며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갈애를 끊고 영원한 종교의 세계로 귀의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조신 설화의 모티프에서 출발한 구운몽의 주인공도 윤회를 거듭하며 인간 세계에서 누리던 부귀와 정념이 무상한 것이며 사실은 금방 사라지고 말 찰나임을 깨닫습니다. 이렇듯 찰나의 시간을 통해 그들은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차원으로 존재의 고양을 이루어냅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시간입니다. 변하는 관점에서 보느냐, 변하지 않는 관점에서 보느냐, 절대적 시간으로 보느냐 상대적 시간으로 보느냐, 크로노스의 시간인가 카이로스의 시간인가에 따라 시간 인식은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찰나와 영겁은 얼마만큼의 시간인 걸까요. 찰나는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합니다. 눈이 분간하는 가장 짧은 시간을 계산해보니 0.017초 정도라고 합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시간 개념은 좀 더 작은 단위까지 들어갑니다. 분자 안에 원자가 한 번 진동하는 시간은 10 내지 100 펨토초라고 합니다. 1 펨토초는 1000조 분의 1초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돈다는 빛의 속도로도 1 펨토초 동안에는 머리카락 굵기 정도의 거리도 다 지나지 못한다고 하니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시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찰나에 반대되는 영원, 영겁은 어느 정도일까요. 선녀가 백 년에 한 번씩 사방 10 킬로미터의 돌산을 얇은 비단 치마로 문질러 그 돌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일겁입니다. 그것의 무한대가 영겁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찰나는 영겁과 만납니다. 실제로 일상에서 자주 찰나에 영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지극한 몰입의 경험이 그것을 가능케 하지요. 뇌의 화학공장이 만들어낸, 뇌 분비 물질의 자극과 반응의 레시피라고 해도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페퍼민트 차를 마시며 글을 쓴 지 한 시간 넘게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저는 시간의 흐름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이었다면 원래 시간보다 훨씬 더 길고 지루하게 느꼈겠지요. 그리고 만약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있었다면 이 시간은 찰나와도 같으면서 영원의 시간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명상이나 기도, 배움, 자신을 관조하고 진정한 충만감을 줄 수 있는 여러 행위를 통해 우리는 지극한 몰입의 경험을 할 수 있고 그것은 기계적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영원이라는 대양과 마주하게 하지요.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 시간, 결정적인 시간, ‘지금 여기’의 충만한 시간. 그것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 합니다. 저는 그걸 들어 올려짐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기 존재가 고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삶에서 그런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람시계도 모자라 스톱워치의 초침에 삶의 박동을 맞추며 시계의 기계음이 내 삶의 주기를 대신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 여기 충만한 순간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페퍼민트 차를 마시며 글을 쓰는 동안 내 존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유영하였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부엉이처럼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워도 내 영혼의 물푸레나무는 지금도 연신 대지로부터 푸르른 물을 길어 올리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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