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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Aug 25. 2022

새 시대의 지평은 경계에서

이상적, 근대의  여항인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1840년 윤상도 투옥 사건에 관련되어 귀양살이하던 59세 때 그린 작품이다. 윤상도가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군신을 이간질한다며 윤상도를 능지처참하고 김정희는 10년전 상소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유배된다.  효명세자의 스승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위태로운 조선 후기를 바로 세우고자 한 개혁사상가였던 추사는 당시 세도가들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유배전 김정희는 조선 최고의 명필로 문장, 문인화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금석학이 대유행인 청나라에서 유명한 조선 최초의 한류스타였다. 유배는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제주 대정현에 도착한 후 사방이 가시울타리로 둘러싸여 빛조차 잘 새어들지 않는 위리안치에 처해졌다. 상심한 아내가 병사하고, 뜻을 같이 하던 서울의 친구들은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 그에게 남은 사람이 이상적이었다.  중국의 귀한 책을 구해 주고 세상 소식을 전하는 변함없는 후원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당시에는 책이 모두 필사본이었고 청에서 들여오는 귀한 책은 집 한 채 값이었다. 이상적은 120여 권의 책을 김정희에게 보냈다. 김정희는 이런 이상적의 의리를 소나무와 잣나무의 한결같은 푸름에 비유하여 세한도를 그렸다.  그리고 글을 썼다.


" 세상의 도도한 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좇거늘, 이렇듯 마음과 힘을 다해 소중한 책들을 바다 멀리 초췌한 늙은이에게 보내주었네. 그대 또한 세상 도도함 속에 사는 한 사람일진대, 그 흐름에서 벗어나 초연히 권세 위에 곧게 서서 권세와 이익을 위해 나를 대하지 않았네... 성인께서 소나무와 잣나무를 특별히 일컬으신 것은 다시 시들지 않은 곧고 굳센 정도만이 아니라 추운 계절에 마음속 가득 느끼신 무언가가 있어서 그러하셨을 것이네"


 흥미로운 것은 이상적이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 역관이었다는 점이다. 역관은 지금의 외교관. 그러나 그 시절에는 한낱 기능인으로 문과에 합격해도 백패를 나눠주어 구별할 정도로 차별이 심했다. 큰 공을 세우면 종 3품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헛된 꿈이었다.  이렇듯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19세기 조선은 이미 근대사회로의 변화의 물꼬가 트이고 있었다. 역관은 근대 이행기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그룹이었고 실질적인 힘의 소유자였다. 사대부들이 필담으로 중국과 소통하던 것에 비해 역관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으로 외교와 무역의 전문가 그룹으로 부상했다. 수차례 외국을 드나들며 '대롱으로 하늘 보는 식'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변화하는 세계를 볼 수 있었고, '국가 기밀과 해외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는 직업의 특성상, 국가 현안의 해결사이면서 중개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엔 중국, 일본 등지서 접한 앞선 문물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화기 선각자로도 활동했다. 이상적의 제자그룹이 청나라의 몰락을 목격하고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나서게 된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상적의 집안 우봉(牛峰) 이 씨는 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한 세습 역관 집안이었고 외가도 유명한 역관 집안이다. 이상적은 중국을 12차례나 다녀오며 청나라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통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정확하게 보고했고 8차 연행에서는 <은송당집>이라는 문집을 청나라에서 펴내기도 했다. 청나라 문인들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 ‘해린척독(海隣尺牘)’이라는 10권 분량의 서한집을 편집해서 내기도 했다.  시를 잘 지어 헌종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이상적은 김정희에게 세상과 통하는 창이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중국과 연결하는 재기의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상적을 포함한 조선시대 여항인들은 고려말의 신진사대부처럼 전시대의 기득권층을 능가하고 사회의 주류로 부상할 만한 저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사대부들의 정쟁에 휘말려 희생되거나 아니면 주류에 끼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방외인으로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러나 '중인 가운데 시민이 성장해, 중인의 한계를 시민의 능력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음 시대를 창조하는 역사적인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는 평가는 여러 시사점을 남긴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건 여항인들의 문학과 예술에의 기여다. 이들은 지식이나 교양, 문화적 소양에서 사대부에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봉건적인 신분 질서 내에서 관직 진출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치열한 자기 인식을 가능케 했고 상층 지향 의식과 현실 사이에서 필연적인 갈등은 다시 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다. 사대부들이 한낱 여기로 여기던 것과는 달리 문화예술을 일생을 바칠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들의 위상 자체가 담지한 비주류성은 중세적 이념, 관습화 된 미의식과 세계관에서 탈주해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여는 동인이 되었다. 16세기 유희경을 필두로 18세기 말 인왕산을 근거로 활동했던 옥계시사, 19세기 말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육교시사 동인들, 이덕무에게 시를 배우고 19세기 조선의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로 평가받는 조수삼 등이 여항 문학을 선도한 사람들이었다. 중인들이 주축이었으나 서얼, 평민, 노비까지 확장되었으며 이후 스스로 변화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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