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사색 Jul 10. 2023

[오라이쌤] 바늘 떨어지는 소리

프리랜서 강사시절 당황했던 경험담

살면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 글자 그대로 눈앞이 깜깜 해질 만큼 당황했던 경험떠올려 보았다. 손꼽힐 만큼 기억에 남았던 일로, 취업강사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 했던 경험담 중 하나이다. 내 이야기가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메시지 전달-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집중력이 흩어져 산만한 상태의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작은 팁이 되길 바란다.


프리랜서 취업강사로서 전국 방방곡곡 대학을 다니며 강의하던 때였다.


채용포털사이트 컨설턴트였을 때부터 채용박람회 취업캠프 특강 등등 다년간 강의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있기에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수월하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기분 좋은 긴장감과 약간의 흥분을 동반한 기대감을 갖고 대전에 있는 4년제 대학교에 방문했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학생수가 예상을 뛰어넘어 어마무시했다. 평소 100명 내외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주로 진행해 왔기에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앉아있는 대강의장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당황과 위압감은 대단했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이힐을 신어도 160센티 언저리인 작은 체구의 내가, 예상치 못한 대규모 학생집단을 마주한 순간의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지 말이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숨이 턱 막혔다. 온몸이 쪼그라들다 못해 당장이라도 기절하거나 죽을 것 같았다.


많아야 몇 백 명 정도일 거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강단에 서서 바라본 3층 높이의 강의장 끝에 있는 학생들은 얼굴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멀었다. 너무 크고 너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였다는 사실에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순간 머리는 하얘지고 귀가 먹먹해질 만큼 당황했다. 무섭고 기가 질려 당장 도망가고 싶었다.


조교가 내 강의안 PPT를 스크린에 띄우는 동안 홀로 치열하게, 입술이 바짝 마르는 초조감과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티 나지 않게 표정관리하며 한 시간 같은 몇 분이 지나도 여전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교직원이 마이크를 들고 학생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마이크를 넘겨받자 대강의장이 울릴 만큼 커다란 박수소리가 쏟아지는 강단에 결국 혼자 남고 말았다. 여전히 두렵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한시바삐 정신 차리고 이 강의를 무사히 끝마쳐야 다. 당장 스스로 뺨이라도 쳐서 정신 차리고 싶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를 되뇌며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양다리에 힘을 주고 학생들을 향해 섰다. (학생들은 적이 아니지만, 당시엔 강당을 향해 앉아있는 학생들이 커다란 덩어리처럼 뭉뚱그려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전투에 임하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공식적으로 강의가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장내는 소란스러웠다. 당연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대기 중이었기에 강의 시작 전부터 그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소음과 둘셋씩 소리 죽여 나누는 대화들이 모여 시장통 같았다. 강사 소개가 끝나고 나에게 마이크가 전해진 뒤에도 곳곳에서 소음과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산만한 소음 속에서 대강의장 스크린 앞에 서있었던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학생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조용하라고 소리쳐 집중을 유도할 것인가, 아니면 기다릴 것인가.


나의 선택은 아무 제재 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온전히 집중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기에 불안했다. 몇 초, 몇 분이 되든 피가 말리는 순간을 참고 기다릴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어느 강사의 조언이 생각났고 결정적으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강한 바람(강제성)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자발성)이라는 우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만히 마이크를 들고 학생들을 향해 서있었다. 그들이 알아챌 때까지, 단상 위의 강사가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강단 위 낯선 강사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숨 죽이고 나의 언행을 기다릴 때까지.


나의 선택은 옳았다. 떠들썩하기가 시장통 같던 대강의장 소음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그리곤 다들 호기심이 발동해 초집중 모드로 나에게 시선이 몰렸다. 당장이라도 말을 꺼낼 것처럼 마이크를 입 앞에 대고 그대로 얼음이 되어 멈춰있었기에 하나 둘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지켜보기 시작했고 나의 시선 끌기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마치 찬 물을 끼얹어 만들어낸 것처럼 긴장된 침묵의 순간이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어쩌면 무모한 시도였을 수도 있으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기대 이상으로 짜릿했다.


호기심에 찬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고 나서야 만족한 나는 크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 내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기에 학생들은 내 말을 더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수차례 진행했던 강의 경력과 꾸준히 업데이트해 온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집중력이 흩트려지지 않게 2시간 내내 실감 나는 사례와 예시를 들려주었다. 학생들이 자신들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때로는 웃기고 공감하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불시에 질문을 던져 긴장감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방적인 발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호응을 끌어내 진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즉석에서 몇몇 학생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더니 같은 학생들의 실제 사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많은 핵생들로 가득 차있었지만 최대한 학생들이 소외감 들지 않게 구석구석 의식적으로 시선을 주려 노력했다. 심지어 멀어서 보이지 않는 3층에 있는 학생 무리에게도 말을 걸었다. 다행히 강의장 구조와 학생들의 협조 덕분에 마이크 없이도 큰 목소리가 전체에 울려 퍼질 수 있었다.


스크린에 띄운 PPT 교안은 손 때 묻도록 고치고 또 고친 자료였기에 강의 진행은 막힘없이 순조로웠다. 평소 현장 상황에 따라 참여자를 참가시키거나 적절한 유머 등을 버무려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던 것도 모두 미리 준비한 스크립트 덕분이었다. 수없이 반복한 내용이라 실수 없이 진행하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강단에 설 때마다 때와 장소,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돌발사항에 대한 준비는 필수다.


강의가 끝나고 Q&A 시간과 추가 질의 방법에 대한 안내를 끝으로 학생들의 열렬한 박수소리를 배경음 삼아 홀가분하게 강단을 내려올 수 있었다.


만약 강의 초반 소란스럽던 혼란 속에서 조용하라고 소리쳤다면 학생들이 바로 내 뜻에 따라 조용해 줬을까? 한두 명 정도는 강사의 요청에 따랐겠지만 일부는 여전히 시끌시끌했을 터이고 산만한 분위기 그대로 강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강의 내내 목이 터져라 볼륨을 키워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집중도를 얻지 못했으리라. 헛기침 소리, 작게 소곤대는 소리까지 1000여 명의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강사 인생 최악의 상황에 놓여 끔찍한 악몽경험했을 수도 있었다. 쉬는 시간 없이 달린 1시간 50 여분 동안, 등줄기가 땀에 흠뻑 젖을 만큼 긴장했고 동시에 학생 군중의 기에 눌리지 않으려 안감힘을 썼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날 무사히 강의를 끝낼 수 있었던 건, 강의 초반 피 말리는 1분 동안 침묵하며 학생들이 스스로 집중할 때까지 기다린 덕분이었고 내겐 신의 한 수였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학생 군중에 위압감을 느껴 다리가 떨리고 식은땀에 온몸이 젖고 도망가고 싶을 터다. 북새통 속에서 길을 잃어 미칠 것 같았지만 정면승부하는 마음으로 단 1분 여(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으나) 동안 침묵하기를 통해 기선 제압할 수 있었던 건, 대책 없이 만용을 부린 게 아니었다. 과거에 만났던 한 강사의 조언 때문이었다. 시끄럽다고 목소리 크기를 키우면 상대는 더 크게 떠든다면서 반대로 작은 소리로 말하면 떠들거나 무관심했던 사람도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는 거였다. 운 좋게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때마침 강사의 조언이 떠올랐고 가만히 침묵한 채 강단 위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단지 기다리기만 했는데 기적이 일어나듯 강의장 소음이 사라졌다. 정말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큼 정적으로 가득 찬 대강의장은 기이할 정도로 진공상태였고 입을 열어 첫마디를 내뱉는 순간 이미 성공을 예감케 했다.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숨 막히게 아찔하고 뿌듯했던 경험이었다.


누구나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 또는 재고 평가하는 시선들에 위축되고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당장 도망가고 싶을 수도 있다. 만약 도망가거나 피할 수 없다면 떨리는 양 무릎에 힘을 주고 군중을 행해 똑바로 마주 보고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즐기라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 강사든 발표자든 그 강단에 선 당신이 주인공이다. 강의(발표)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주도권을 가진, 내가 준비해 온 발표 내용도 나만 알고 있다. 당연히 큰 실수가 아닌 작은 실수는 티도 안 난다. 본인만 알아챌 수 있는 작고 사소한 실수에 연연하기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만 제대로 알리면 충분하다. 나아가 상대를 공감하게 하고 설득시켜 행동의 변화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더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두 다리가 떨리고 등이 온통 땀으로 젖어도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다. 끝까지 해내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그 강의를 망친다 해도 영원한 실패는 아니다. 그저 하나의 문제 상황에 대한 경험치를 얻고 훗날 현명한 대처방법을 배우고 깨우쳐 성장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다루진 못했으나 나 역시 자잘한 실수, 부족한 실력과 미흡한 대처로 좌절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다행히 다음의 기회가 주어졌기에 계속할 수 있었을 뿐.


스스로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맞닥뜨릴 때마다 한 동안 타격감이나 낭패감에 정신 못 차릴 수 있다. 실망과 좌절은 잠시일 뿐, 그 이후 시간에 발버둥(건설적인 노력?)이 뒤따르기만 한다면 시행착오는 결국 성장과 재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매번 생각만큼 쉽지 않지만, 당황했을 때 잠시 혼란한 감정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담대하게 눈앞에 처한 상황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해결방법이 떠오르고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잘 안 됐어도 괜찮다. 또 다른 기회는 뒤 이어 따라온다. 미리 겁먹기보다 막상 부딪쳐보면 의외로 술술 풀릴 수도 있다. 그러니 괜찮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영광도 좌절도 모두 지나간다. 오직 나에겐 레벨업 할 수 있는 경험치와 성장의 기회가 남는다고 생각하면 당장의 어려움도 웬만하면 다 극복 가능하지 않을까. 다음 기회를 노리고 지금보다 조금씩이라도 계속 나아지면 되니까. 나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어쩌면 잠시 숨 돌리고 발버둥 칠 시간이 필요할 뿐.

이전 07화 [창작시] 바라건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