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른 그날 밤
선희 씨에게는 아주 예쁜 딸이 한 명 있다.
정말 뻔한 얘기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여쁘다.
일찍 떠난 아빠를 닮아 흰 피부에 눈 코 입 오목조목 조화롭다. 특히 환하게 웃을 때면 긴 눈꼬리의 외까풀 눈이 사르르 감겨 웃는 이모티콘처럼 선만 남곤 했는데 보는 이도 절로 따라 웃게 만들었다. 더불어 움푹 패이는 볼우물이 볼수록 매력적인 아가씨다.
단정한 외모뿐 아니라 선하고 바른 언행에 주위의 칭찬이 자자해서 선희 씨에게 늘 자랑스러운 딸이다.
시내 번화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선희 씨 집은 주택가여서 평소 조용하고 사건사고도 없는 평범한 작은 동네이다. 집에서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번화가가 있는데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선희 씨가 데리러 나가곤 했다. 집 근처까지 오는 마을버스를 타도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해 2~30분 걸리기 때문이다. 대체로 딸과 함께 모녀가 집까지 걸어오는 20여분 동안 동네 마실 겸 밤 산책하는 시간이 선희 씨에겐 소중하고 행복한 일상이었다.
선희 씨는 여느 때처럼 딸 퇴근 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출발하려 했다. 다만 그날따라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많이 왔다. 평소 알고 지내는 지인이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지인들과 상갓집에 함께 갈 약속을 잡다 보니 이런저런 연락을 주고받느라 배터리가 꺼지기 직전이었다. 마음이 번잡스럽고 정신이 없었던 선희 씨는 직접 가꾸며 위안을 얻고 있던 집 앞 작은 텃밭과 화분을 보러 나왔다. 작은 위로를 얻기 위해 살피러 간 텃밭이 동네 떠돌이 개가 헤집어 놓았는지 엉망이었고 딸을 데리러 나가야 하는 시간이 코앞이었지만 속상한 마음에 수습하다가 집에 다시 들르지도 못한 채 곧장 길을 나서야 했다. 서둘렀음에도 평소보다 늦게 출발한 셈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문제가 생겼다. 딸이 기다릴까 봐 서두르다 그만 깜빡하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둔 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이미 10분 가까이 걸어 나온 뒤라 잠시 고민하던 선희 씨는 다시 갔다 오면 늦을 거 같아서 그냥 걷는 속도를 높였다.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어서 빨리 해맑게 웃는 딸아이의 얼굴을 봐야지 이 불안이 가실 거 같았다.
마음이 바쁜 선희 씨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가로질러 가기 위해 평소엔 잘 가지 않는 골목길 방향으로 틀었다. 최근에 재개발 때문에 빈집들이 생겨나고 있던 때라 유독 밤 시간만 되면 동네 불량학생들의 집합장소처럼 돼버린 야트막한 뒷산 근처 놀이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밤늦도록 소란스러운 소음을 일으키는 데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등 주변을 어질러 놓기는 예사이고 최근엔 지나가는 행인에게 욕설과 시비를 아무렇지 않게 거는 경우가 생겨서 최근 동네 어르신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곤 했다.
빈집들에 둘러 쌓여 있는 한적한 곳이다 보니 현재로서 마땅히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조만간 동사무소에 민원을 넣거나 강경 대응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을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자기들끼리 시비가 붙은 건지 조금 큰 소리로 말다툼을 하는 듯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괜한 시비에 휘말릴까 두려워 선희 씨는 더욱 재게 발을 놀려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어둑한 놀이터를 뒤로 하고 골목을 벗어나던 그때였다. 작은 비명 소리를 들었다. 아니 비명 소리라고 할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고 신음소리인지 아니면 조금 크게 새는 트림 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조금 거북한 소리였고 뒷머리가 순간 지끈거릴 정도로 신경이 거슬렸다. 다시 되돌아가 무슨 일인지 확인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일단 딸아이가 먼저라는 생각에 종종걸음으로 황급히 내달렸다.
이미 평소보다 늦은 데다 핸드폰까지 집에 두고 와서 딸과 연락할 수조차 없으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딸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시간을 단축시켰음에도 이미 딸이 아르바이트하는 커피숍은 모든 조명이 꺼진 채 완전히 닫혀있었고 유난히 어두침침해 보이는 거리에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오지 않는 선희 씨를 기다리다 딸이 전화를 건 건 아닐까? 전화를 받지 않는 엄마를 걱정해서 집을 향해 이미 출발한 건 아닐까? 중간에서 만날 수도 있으니 혼자 걸어갔을까? 아니면 안전하게 마을버스를 탔을까? 여러 가지 경우가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서로 길이 엇갈린 건가 싶었던 선희 씨는 일단 집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10시가 넘도록 모녀가 밤 산책 겸 마실 나가 듯 동네 구경을 다니느라 천천히 돌아다니는 골목을 다 들러볼 수는 없으니 집을 향해 최단거리 길로 거슬러 갔다.
오늘따라 거리가 한산해서 인적도 드물어 평소 다정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던 동네 거리가 낯설고 으슥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집에 돌아온 선희 씨는 숨을 몰아쉬며 빌라 계단을 뛰다시피 겅중겅중 올라갔다. 문을 열고 딸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집은 비어있었고 딸아이가 집에 온 흔적도 없었다. 얼른 안방에서 충전 중이던 핸드폰을 찾아 딸아이에게 전화하려고 했더니 엎친데 덮친 격인지 핸드폰이 완전히 방전되어 꺼져있었다. 평소 안 쓰는 코드는 전원 차단 스위치를 꺼두는데 하필이면 전원이 차단된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아놓아서 충전은커녕 방전된 상황이었다.
불길한 마음에 급속 충전기를 찾아 서둘러 연결하고 3%에서 겨우 핸드폰 전원이 켜졌다. 역시나 딸로부터 여러 차례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고 메시지 톡이 여럿 와있었다. 급한 마음에 딸에게 전화를 걸며 메시지를 살펴보는데 오늘 몸이 좀 안 좋았던 딸이 사장에게 양해를 얻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문을 닫게 되었다며 전화를 여러 차례 했는데 계속 통화 중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전화가 아예 꺼진 건지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가 불안한 마음이 들어 집을 향해 출발했다고 실시간으로 계속 톡을 남겼다. 혼자 걸어오는 길이 심심했는지 대화창에 톡이 한가득 남겨 있었다. 마지막 톡이 '집이 코앞이니 좀 만 기다려'라는 내용이었다.
신호가 계속 가는데 음성안내로 넘어갈 때까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 딸아이에게 연달아 전화를 걸면서 딸아이가 쓴 톡 내용을 거슬러 올라가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평소엔 엄마와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걸으니 많이 낯설고 으슥하더라는 투정 섞인 톡과 오들오들 떠는 이모티콘 등으로 혼잣말하듯 대화창에 계속 써 내려가다 집에 거의 다 와간다는 톡 바로 직전에 남긴 톡을 읽자마자 선희 씨는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사랑하는 내딸: 사랑하는 선희씨~ 무슨 전화 통화가 끝이 없으시죠?
전화 좀 받으시죠~ 몇 번째야~~~힝ㅠㅠ
헐. 전화기 꺼져있음.
우리 헐렝이 여사님 또 핸드폰 방전시킨 거 아님?
으이궁. 그러길래 미리미리 배터리 좀 확인하시죠~
나 오늘 배탈 나서 화장실에 몇 번이나 갔는 줄 몰라. 변기 막힐 뻔 ㅋㅋㅋ
사장님한테 허락받고 1시간 일찍 퇴근하려고 했는데..
엄마 때문에 30분 더 기다렸어! 나 화남!!!
핸드폰 방전시켜놓고 잊어버렸지? 어째~ 더 기다려 말아??
엄마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냥 나 지금 출발해요.
슬슬 또 소식이 올 거 같아 불안불안.
다시 가게 문 열고 화장실 가는 거보단 집 가는 게 나을 듯 ㅋㅋ
엄마랑 같이 걸어가던 길인데 혼자 가니까 좀 낯설다 >.<
오늘따라 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더 무서운 듯.. 으스스
짐 거의 경보대회 선수처럼 걷고 있어. 배 아파서 뛰진 못해!!
헐 안되겠당. 나 배 아파서 도저히 집까지 못 가겠네.
근처 놀이터 화장실에서 급똥 해결하고 갈게용. ㅋㅋ
집이 코앞이니 좀 만 기다려^^
으슥한 골목길을 걷다 떠오른 짧은 이야기예요.
평소 안전하다 생각하는 길이라도 무방비하게 혼자 다니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짧은 소설을 틈틈이 써볼까 해요.
이제 시작해보는 거라 부족하지만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