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비단이는 장애가 심한 편이라 말도 거의 하지 못하고, 기저귀도 가리지 못한다. 그러나 몸은 훌쩍 큰 소년인지라 겉으로 보아서는 아픈 아이 태가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 "몇 살이야?" 라고 묻는 어른들의 질문에 아이는 답할 수 없지만, 어른들은 요새 애들은 인사를 할 줄 모른다고 혀를 찼다. 부모가 매일 아이를 업고 안고 다니니 애들이 숫기도 없고 사교성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업고 싶어서 업는 게 아니라, 업어주지 않으면 아이가 악을 쓰며 울어대니 어쩔 수 없는 것인데. 나도 160이 채 되지 않는 키로 말만한 아이를 등에 지고 다니기 힘든데. 인사를 안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못해요. 그러나 그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어디까지나 내 속의 아우성일 뿐이었다. 오늘도 뱉지 못한 말을 입 안에서 꿀꺽 삼켰다. 공기를 삼켰는데 쓴물이 넘어왔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점점 뚜렷한 장애 성향을 보였다. 화가 나면 자리에서 쿵쿵 뛰었고 높은 곳에 올라가 체중을 실어 힘껏 뛰어내렸다. 아무리 붙어앉아 아이를 말려도 잠시 눈을 떼면 순식간에 뛰어버리고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아이를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온 집안의 문을 꼭꼭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어쩌다 아이들과 주말에 집에 있는 날이면 해가 뜨는지 비가 오는지도 모르게 창문을 가리고 대문을 닫아걸었다. 백만원 가까이 들여 온 집에 매트를 깔았다. 그러나 아이가 뛰어대며 내는 소음은 아무리 두껍게 매트를 시공해도 완벽히 막을 수가 없었다.
하나 둘 항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시끄러워요, 댁의 아이들 때문에 잠을 못잡니다, 공부하게 조용히 좀 해주세요. 애들 교육 좀 똑바로 시키시죠. 다양한 연령층들의 가시 돋친 항의가 줄줄이 집앞에 붙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혹시나 아이들을 보고 욕할까봐 사람이 없기를 기다려 타고, 누가 올 새라 서둘러 닫힘 버튼을 눌렀다. 남편과 나는 이 동네에서 공식적인 죄인이었다.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면 누가 알아볼새라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썼다.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아이와 이 집에서 살기 위해서는 절충이 필요했다. 우리는 아이가 다니던 병원의 주치의와 상의하여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어린 아이에게 독한 약을 먹이려니 마음이 아팠지만, 우리가 다 같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약을 먹이면 다 될 줄 알았다. 내가 마음 아픈 것만 잘 견디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내 착각이었다. 아이는 약효가 잘 듣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거세게 뛰거나 엉엉 울어댔다. 쿵쿵, 엉엉, 으아앙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나 역시 목소리가 높아지는 날이 잦아졌다. 그런 날이면 대문 앞에는 어김없이 쪽지가 추가되었다.
쪽지를 떼어냈다. 신경질적으로 테이프를 붙였던 자리가 끈끈하게 남았다. 어디에 붙여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포스트잇처럼, 마음의 상처들도 말끔히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아이의 마음 속에도 감정이 지나간 끈끈한 흔적들이 늘어만 갔다.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아이는 어제와 똑같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픈 아이이니 이해하고 참아야지, 하는 마음은 육아서 속에만 있는 문장이었다. 이해하고 참기에는 내게 닥친 상황은 너무 벅차고 고됐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욕을 먹더라도, 솔직하게 이웃분들께 사과를 드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나는 고심 끝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적어나갔다. 아이의 상황을 조심스레 적고 양해를 구했다. 최근 장애아들의 일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한바탕 지나간 후라 이러한 글을 쓰는 것에는 많은 망설임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 한 장의 게시물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000호입니다 (...)
최근 저희 집 소음으로 인해 많은 불편을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선 부모로서 아이를 잘 가르치지 못해 이웃분들께 불편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희는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장애가 있어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병원을 다니며 약물치료를 받고 있습니다만 나이가 어려 고용량을 쓰지 못하다보니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장애는 부모로서는 마음아픈 일입니다만, 이런 이유가 이웃분들께 피해를 드리는 것에 대한 정당함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불편을 드린 점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 집 전체에 매트를 시공하고, 최대한 늦게 아이를 하원시키고 있지만 여러모로 부족함이 있을 것을 압니다. 저희도 할 수 있는 더 많은 노력과 생각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아이들입니다만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해주시고 따뜻한 말씀 건네주시는 분들께도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많은 배려를 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말해줘서 고마워요, 응원할게요!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나는 힘겹게 일을 마치고 퇴근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마음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혹시나 불쾌하게 생각하시지는 않았을까?누가 찢어버렸거나 욕설이라도 써있으면 어쩌지? 아니, 그래도 사과문인데 욕설까지는 좀 그렇지 않나? 이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땡!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비볐다.
내가 붙인 게시물은 아주 곱게, 잘 붙어 있었다. 누군가가 뜯으려고 시도한 흔적조차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빈 여백 곳곳에 펜으로 한자 한자 써주신 응원의 메시지가 있었다. '괜찮습니다, 힘내세요!', '괜찮습니다. 응원할게요.' '용기 가지세요.' 나도 모르게 핑 눈물이 돌았다. 잠시나마 문 앞에서 가졌던 생각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사실, 내 집에서만큼은 방해받지 않고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층간소음이 끝없이 이슈가 되고, 간혹 끔찍한 사고로까지 이어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에서만큼은 최소한의 쉴 권리는 보장받고 싶은 마음. 게다가 우리 아파트는 특성상 어르신들만 사시는 가구가 많다. 우리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어쩌면 그분들에게는 이제 하루를 마치고 주무셔야 할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울리는 쿵쿵쿵, 으아앙 매일같이 울리는 소리가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럼에도 나의 부족한 글을 읽고 마음 한 켠을 내주시어 용기와 응원을 보내주시는 큰 마음. 내가 우리 비단이와 살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일이 나에게 아이의 손을 붙잡고 세상을 살아갈 큰 용기가 되어줄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라이킷을 눌러주신 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오늘도 제 연필이 작은 종이를 비집고 나와 그림을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