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들이 둘이 있다. 이제 일곱 살, 네 살이지만 세 살짜리 아들 둘을 키우는 마음으로 산다. 시간이 흘러도 내 아이는 여전히 세 살일 것이다. 금쪽같은 내 첫 아들, 우리 비단이는 한달 전 자폐성장애 2급을 받아 국가에서 인정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처음부터 아이가 눈에 띄게 이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발달이 늦으려니, 코로나로 인해 많이 활동을 못하다보니, 엄마가 부족해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돌 즈음 들어본 엄마 맘마 소리를 끝으로 아이는 더 이상 말이 늘지 않았다. 잼잼, 곤지곤지 같은 간단한 손동작도 하지 못했고 자꾸만 장난감을 갖고 혼자 놀고 싶어했다. 친구들 사이에 있어도 늘 겉돌았고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엄마 닮아서 그런지 아이가 사교성이 없고 사람을 가린다는 농담에 나는 편히 웃을 수 없었다. 엄마의 촉이라는 건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자꾸만 아이를 보는 등골이 싸했다. 결정적으로, 어린이집 상담 후 그냥 있으면 안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좋다는 병원을 찾아 하루에 백 통씩 전화를 걸었고, 마침내 예약에 성공했다. 선생님은 자상하고 따뜻하게 아이를 살폈다. 아이와 놀아보기도 하고, 간단한 과제를 주기도 했다. 비단이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고 낯선 공간에서 불안해했다. 아이를 지켜보며 바쁘게 무언가를 적던 선생님이 이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머니, 아이는 자폐스펙트럼이 있고, 이로 인해 지적장애가 동반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능은 앞으로 검사를 해 보아야 겠지만, 기대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어요..."
자폐일수도 있겠다는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발달이 늦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짐작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지능이 낮아서라고? 장애가 하나가 아니라고? 그럼 나는? 우리 아들은 어떻게 되는거지? 나는 또다시 무너져내렸다. 나에게 행복은 여전히 사치였다. 단지, 나를 몰아세우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장마는 이제 시작이었다.
아이가 장애를 진단받았다고 해서 당장 일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 말을 안듣던 내 아들은 오늘도 말을 안 듣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 부부의 시간표가 조금 더 빼곡해지고 바빠진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치료하고 조금이라도 좋은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이를 데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비용과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돈은 더 필요했지만 돈을 벌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어갔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보였고 더 이상 끌어올 돈도 마땅치 않았다.
모든 아이들이 같지는 않겠지만 앞선 글에서도 적었듯 비단이의 경우 치료실에서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언어수업을 받았지만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오열하며 수업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처음에는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대했지만, 갈수록 나는 아이를 저울 위에 두고 애꿏게 흘러가는 시간과 돈을 가늠했다. 아, 또 우네. 십분에 이만원인데, 이만 원을 공중에 뿌렸네 또. 대기실 소파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혐오스럽고 우스웠다. 믹스커피는 이가 시리게 달았고 블랙커피는 위벽이 헐 것처럼 속이 쓰렸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장애가 있어요, 라고 하면 대부분 안쓰러운 연민과 동정을 보낸다. 엄마아빠가 참 힘들겠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아이를 위해 버텨야죠. 하지만 다들 모르는 것이 있었다. 장애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감상과 감정에 오래 휩싸일 만큼 한가롭지 못하다. 일단 제도적으로 처리하고 알아볼 것들이 너무나 많고, 아이의 몸이 커 감에 따라 챙겨야 할 것도 수십가지였다. 그러나 부모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당장 눈 앞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어도, 내 아이는 여전히 세 살에 머문다. 나는 계속해서 늙고 노동력을 잃어가지만 내 아이는 스스로의 삶을 위해 돈을 벌거나 홀로 자립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죽을 때까지 돈을 벌고 아이를 보살펴야한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아니, 장애인들 대상으로 하는 고용도 있고, 직업훈련 같은 것도 받고 그러던데요? 네, 그런게 있지요. 하지만, 그 역시도 어느 정도 아이가 성장해줄 때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들의 경우 이만큼 자립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그리고, 그만큼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결국 부모가 쏟아붓는 돈에 정비례한다. 우리 나라의 제도적 장치나 복지로는 장애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거나 살아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단적인 예로 특수학교만 짓는다고 해도 집값이 떨어진다며 득달같이 반대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장애아 부모들이 단체로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 뉴스 헤드라인에 걸려도, 인식 개선은 커녕 초등교육조차 받게 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의 현실이다. 하물며 성인장애인들에 대한 처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 주변의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은 모두 바쁘다. 부업을 하고 두세 개씩 일을 하고, 치료실로 센터로 부지런히 아이들을 실어나른다. 아이가 클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간식을 사다나르며 주변에 굽신대고 양해를 구한다. 병원이라도 한 번 갈라치면 몸살날 각오를 하고 움직여야 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예쁘게 꾸미고 취미 생활도 하고, 저녁이면 사람들도 만나고 술도 한잔 하는 그런 생활은 우리에겐 우담바라와 같은 전설 속 이야기다. 어쩌다 한 번씩, 참지 못하게 우울해지는 날 눈물이 난다. 그렇게 눈물이 날 때면, 우리 부부는 서로를 다그치고 화를 낸다. 울지 말라고, 눈물도 사치라고 버럭대며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는 슬프면 울면 그만이지만, 이유도 모른채 아픈 몸으로 세상에 나와 이리저리 깨지며 살아가야 하는 아이 앞에서 이런 감성팔이도 사치일 뿐이다.
비단이의 예민함은 점점 심해졌다. 한번 터지면 한시간씩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사람에게 몸을 붙이고 있거나 안겨있지 않으면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이십키로에 육박하는 아이를 온 몸으로 치대기란 체력 소모가 무척 많은 일이었다.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의 소통은 늘 고요속의 외침처럼 불완전했다. 나도 남편도 조금씩 지쳐갔다. 우리가 이 지난한 삶을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장애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끝없는 인내심과의 싸움이었고 나라는 사람의 밑바닥을 보는 일이었다. 말라버린 가슴 속 우물에 두레박을 던졌다. 쿵 하고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직 버리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이 한 가득 잡초처럼 붙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