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자폐성향이 두돌부터 나타났던 비단이는 천성이 예민한 아이였다. 예민한 감각과 더불어 불안도도 상당히 높았다. 게다가 새벽에 생활해버릇한 내 습관을 닮아서인지 낮에는 쿨쿨 잤고 밤에는 내내 깨서 보채고 울어댔다.
조용한 새벽시간과 고요함을 먹고 사는 나에게는 참으로 쥐약같은 조건이었다. 입맛도 까다로웠고 행동은 제어되지 않아 어디서든 산만하고 날뛰었다. 인별 등에 올라오는 '카페데이트' 혹은 '엄마와의 나들이' 는 꿈같은 소리였다. 자기 발로 열걸음도 걷지 않으려 드는 15키로의 아이를 데리고 삼십분 이상의 외출은 불가능했다. 조용한 공간에서는 십분을 버티지 못하고 굽신대며 쫓겨나듯 나와야했다.
그렇게 쫓겨나온 어느날, 햇살은 너무 뜨거웠고 하늘은 너무나 새파랬다. 아기띠를 한 내 모습을 멍하니 버스정류장에 비추어보다가 엉엉 눈물이 났다.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린 내 삶의 포지션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우울했고 아이에게 다정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죄책감에 시달렸다. 조금씩 망가져가는 마음이 느껴졌지만 내 마음 따위를 들여다보고 달랠 시간이 없었다.
비단이는 늘 엄마 혹은 아빠의 몸에 붙어있어야 했고 잠잘 때조차 어딘가는 몸이 붙어있어야만 했다. 성향이 예민하다보니 작은 일에도 쉽게 울었고 쉬이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사회성이 떨어지다보니 친구도 없었고 친척집에라도 갈라치면 그 집 대문앞에서 들어가기까지 한시간씩 울어야 상황이 종료되곤 했다. 남편이 술이라도 한잔 한 날이면 그날 밤은 지옥이 따로없었다. 바뀐 환경에서 아이는 웃었다가 울었다가 끊임없는 감정의 기복을 반복했고 나는 달래다가 화내다가 어르다가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내 얼굴은 점차 표정을 잃었고, 아무런 것에도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아이를 데리고 간 센터에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엄마들끼리 소파에 앉아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엄마 봐봐, 아픈 애 키우면서 화장하고 메니큐어도 발라? 어휴, 그럴 시간에 애나 똑바로 키우지. 나는 애 키우면서 다 내려놓았어. 오늘은 치료만 여섯개야 나는. "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고싶지도 않았다. 아픈 애 데려와서 앉아있는 엄마들끼리 이런 대화가 오간다는 자체가 소름끼치고 불쾌했다. 몇 번인가 내게 참견어린 말을 걸고 싶어하는 기척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어떠한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말하는 에너지가 벅찼다.
아, 이러다가 나는 서서히 시들어 죽겠구나. 이렇게 너를 키우다가 말라가겠구나. 내게는 더 나은 삶이란 없겠지. 평생 모든 곳에 너를 동반하고 다녀야되겠지. 네가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우리는 어디도 갈 수 없겠지. 이 아이가 내게 온 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고 아이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왜 내게만 이런 가혹함이 따른걸까. 다들 예쁘고 착하고 까부대는 귀여운 아이들을 잘만 낳고 사는데. 왜 내게는 이렇게 아픈 아이가 왔을까. 결혼 전에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그래도 나는 담배는 안피웠는데. 술은 마셨지만 운동도 꼬박꼬박했는데. 혹시 내가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초콜릿과 커피만 먹어대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너무 스트레스가 많을때 아이가 찾아왔나? 생각은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또아리를 틀었고 서서히 내 목을 졸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크게 숨쉴 기력도, 산 정상에 올라가 심호흡을 하고 메아리를 외쳐볼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종교도 없어서 이럴 때쯤 찾아온다는 신의 부르심 혹은 간증 비슷한 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남편은 곁에서 든든하고 굳세게 버텨주었지만 당시의 내겐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젊은 나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고, 어떻게든 아이를 키우며 살아야만 했다. 비단이를 데리고 살아갈 방법과 이유를 찾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