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비선비 Nov 02. 2021

끝까지 사과하지 않는 그에게 총을 쐈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결말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를 좋아한다. 에일리언, 프로메테우스, 블레이드 러너, 글레디에이터 등 굵직한 명작들을 많이도 남겼다. 그의 영화에선 해석이 어렵고 복잡하기보단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서사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다소 뻔한 스토리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어딘가 세련되고 의미심장해진다.

 여성주의 영화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대표작 ‘델마와 루이스’또한 결국 파국으로 흐르는 정해진 스토리 안에서 아름다운 미술과 카타르시스를 무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영화는 미국 남부 지역의 풍경과 그에 어울리는 음악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커피를 무제한으로 리필해 주는 미국식 식당에서 일하는 루이스가 등장한다. 그녀는 터프하게 담배를 한 모금 빨면서 식당 전화로 델마에게 전화를 건다. 델마와 루이스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미 준비를 마친 루이스와는 달리, 델마는 아직 남편에게 여행 간다는 사실 조차 말하지 못했다. 그의 고지식한 남편이 보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델마는 남편에게 포스트잇 하나 만을 남기고 루이스와 여행길에 오른다. 지치고 지루한 일상을 잠시 내던지고 일탈을 나선 것이다.


 두 여인은 선글라스를 끼고 멋들어진 녹색 컨버터블에 오르며 여행을 시작한다.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자유를 만끽하는 로드트립의 분위기에서 2018년작 그린 북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각각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제 역시 억압을 행하는 주체인 백인 남성에 대한 반항과 외로운 싸움으로 동일하다. 아무래도 뒤늦게 개봉한 그린 북이 델마와 루이스에 영감을 받아 이미지를 차용하지 않았을까.


자유와 해방을 위한 듀오의 로드트립이라는 공통점

 그렇게 간만의 일탈을 즐기던 델마와 루이스에게 불의한 사고가 터진다. 클럽에서 델마에게 집적대던 한 남자가 급기야 주차장에서 그녀에게 겁탈을 시도했다. 이를 목격한 루이스는 급하게 차에서 델마의 권총을 갖고 와 남자를 저지한다. 발정 난 개를 떼어놓자 여자에게 당한 게 너무나 억울했는지 그는 끝까지 욕설을 늘어놓는다. 루이스는 마지막 경고에도 끝까지 입을 놀리는 남자의 가슴에게 총을 발사하고, 총을 맞은 남자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만다.


 평온할 것만 같은 힐링 여행은 이로써 끝이 났다. 화사하고 현란했던 초반의 영상 색채는 모두 지워지고, 영화는 온통 차갑고 건조한 톤으로 변했다. 자수하자던 델마의 요청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며 루이스는 거부했고, 둘은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된다.




 영화의 얼어붙은 분위기는 루이스의 애인 지미와 브레드 피트가 연기한 ‘제이디’가 등장하고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자초 지중을 설명해 주지 않는 루이스에게 화를 내면서도 지미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드러낸다. 히치하이킹을 하던 제이디는 치명적인 미소로 델마에게 매력을 어필하는데, 미드 ‘오피스’의 등장인물 엔디가 직장동료에게 ‘난 게이가 아니지만 해변에서 나에게 키스하는 브레드 피트를 상상하면 거부할 자신은 없어.’라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성애자도 당할 수밖에 없는 그의 미인계를 그녀가 어떻게 저항할까? 델마는 결국 마음뿐 아니라 지미가 가져온 루이스의 돈 6,700달러 까지 모두 도둑맞는다. 설상가상. 델마와 루이스는 이제 빈털터리 도망자가 된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인 델마와 루이스에게 기본적으로 얕잡아 보는 태도와 혹은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근성을 갖고 있다. 그나마 형사로 등장하는 ‘할’만이 진심으로 둘을 돕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과거 성폭력을 당한 트라우마로 남자를 더 이상 믿지 않는 루이스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살인을 저질렀을 때 폭력 흔적을 증거로 자수했다면 정당방위나 실형을 선고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밝혀지는 루이스의 과거는 그녀가 경찰에게 알릴 수 없었던 배경을 은은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을 더욱 저리게 한다.




 둘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델마는 제이디의 방식대로 상점을 털고 경찰관을 총으로 위협하는 등 상황은 점점 돌이킬 수 없을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델마와 루이스는 막장으로 치닫을수록 되려 의연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특히 델마는 놀러 간다 말도 못 할 정도로 남편에게 휘둘리던 여자였지만 어느새 터프하고 자기 결정권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했다. 비록 범죄자가 되었을 지라도 변화한 그녀의 모습은 긍정적이었다. 관객이 그녀를 응원할 수 있는 이유는 억압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감독이 잘 나타내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악습과 권위에 도전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이런 해소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탱크로리 신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여행 중에 세 번을 마주칠 때마다 더럽고 음흉한 제스처로 그녀들을 희롱하던 트럭 기사를 멈춰 세운다. 그 와중에 자신의 유혹(?)이 통한 걸로 착각한 멍청한 기사는 차에서 내리며 콘돔을 챙긴다. 당연히 화가 잔뜩 난 여자들을 마주하며, 남자는 겁탈남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향하는 총구에도 사과하지 않는다. 이어서 총알은 발사되고, 가스를 실은 탱크로리는 엄청난 화염에 휩싸이며 폭발한다. 자존심 때문에 여자에겐 절대 사과할 수 없었던 남자의 최후인 것이다.


 두 여인을 잡기 위해 총출동한 헬기와 어마어마한 무장 병력들 앞에 있고, 뒤에는 그랜드 케니언을 연상시키는 깎아지른 절벽이 버티고 있는 상황. 델마와 루이스는 결국 자수하는 길보단 차라리 눈앞의 절벽을 택한다. 죽음을 맞이한 상황에서, 둘의 표정엔 그 어느 때보다 자유와 해방감이 깃들어 있다.




 다소 극단적인 결말이긴 하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잘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델마와 루이스의 대응이 그저 '영화니까'라고 하기엔 그녀들이 겪은 불행 만큼은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일상에서 뭐라도 해야만 한다. 꼭 탱크로리를 폭파시키는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화염에 휩싸인 탱크로리


매거진의 이전글 사막에서 찾은 오리지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