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내가 알던 사랑은 낭만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낭만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이들은 모두 도태되어 버린 느낌이다.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이상적인 사랑은 아직 살아 있다.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다.
이상적인 사랑. 드라마나 소설에서 나올 만큼 진부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골국처럼 오래 묵은 재료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사랑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사랑의 이상과 현실을 이야기할 때, 나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소설 한 편이 있다.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 사랑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과거 연애를 막 시작할 때, 이 책 이야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책을 선물하기도 했고, 상황에 따라서는 줄거리를 요약해서 알려주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걱정되었던 갓 같다. 둘 사이에서 설렘이나 짜릿함이 사라졌을 때, 나는, 혹은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소설 속 주인공 엠마 보바리는 새로운 사랑이 나타날 때마다 그녀의 환상을 만족시켜 줄 거라 믿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희망했고, 노력했고, 또 간절했다. 자기희생은 덤이었다.
먼저 분명하게 하고 싶은 건, 엠마의 가치관은 비판하지 않으려 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이상이 다르기에 그녀가 갈망했던 사랑에 첨언하고 싶지는 않다. 어떠한 모습의 사랑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고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다. 더욱이 그녀의 욕망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다. 남이야 어떻게 살든, 그걸 꼬집어서 비판하고 싶지 않다.
기본적으로 남의 삶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개인적인 삶의 가치를 남의 시선으로 토를 달면서 자존감을 확인하는 가학적인 인물도 아니니.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에 이토록 집중했던 이유는 그녀가 바라던 이상적인 사랑이 어떻게 그녀의 현실과 충돌하고, 그 간극을 그녀는 어떻게 메우고 있는지를 무척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집착, 행복해지겠다는 욕망이 표출되는 방식을 살펴보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더욱이 요즘은 늘 부족하다 말하는 시대이다. 늘 불행하다고 말하는 요즘, 크게 보면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이상향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소설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엠마는 시골 의사인 샤를 보바리와 결혼한다. 그녀는 결혼과 사랑에 대해 자신만의 기대가 있었다. 그녀는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더 화려하고 낭만적인 삶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러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진실한(?) 사랑이라 믿는. 더욱이 그녀는 화려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빚을 지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절망에 빠져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엠마는 결혼 전,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을 문학 작품과 판타지 속에서 찾았다. 소녀 시절 그녀가 읽었던 로맨스 소설들은 그녀의 기대와 욕망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엠마는 화려한 파티, 열정적인 사랑, 감미로운 속삭임 같은 감정적 충만함이 가득한 삶을 꿈꾸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신이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가 이상적으로 그려왔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평화로웠고, 단조로웠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슴 뛰는 일도, 짜릿함도 없었다.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이런 결혼 생활은 그녀의 환상을 더욱 강화시켰다. 경험해보지 못한 삶에 대한 경외가 그녀의 생각을 잠식해 버린 것이다. 엠마는 계속해서 이상향을 추구하게 된다. 지루한 일상을 보내면서 가슴 뛰는 사랑(?)이 자신을 구원해 주는 날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그녀가 갖게 된 사랑에 대한 환상은 로맨스 소설이 제공하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문학 속에서 등장하는 영웅적이고 매혹적인 남자 주인공을 실제 삶에서도 만나기를 원했다. 마치 우리가 소셜 미디어나, 드라마의 사랑을 꿈꾸는 것처럼.
그녀는 눈앞에 있는 평범한 샤를과의 관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꼬집어서 이야기하면,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은 소설 속 그것처럼 극적이고 감정적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기대라는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흔히들 괜찮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이지만, 엠마도 샤를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두 번의 외도에도 그녀의 공허함은 끝내 채워지지 않았다. 과연 그녀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랑을 기다려왔기 때문이었을까?
엠마가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심리적 배경에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깊은 불만과 정서적 공허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는 완벽한 사랑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었다. 사랑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었고, 또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공허함은 어떻게도 채울 수 없는 빈 항아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완벽한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오히려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나빠져만 갔다.
그녀는 샤를과의 결혼에서 기대했던 모습이 있었다. 아마도 가슴 뛰는 일상과 짜릿했던 행복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골에서의 단조로운 일상과 남편 샤를 보바리의 무관심은 그녀의 삶을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소박한 설렘의 순간이 허락되었다면 그녀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소박한 만족 또한 스스로 노력해야 찾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녀에게 작은 설렘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안타깝기도 하다.
소설에서 비치는 그녀는 소박한 행복보다는 감정적으로 충만하고 극적인 사랑을 꿈꾸는 인물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을 벗어나, 이상적이고 완벽한 관계에서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던. 하지만 그녀가 처했던 상황에서 정서적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녀가 이상향에 강박적으로 좇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감정적으로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랑을 삶의 유일한 구원으로 여겼다. 남편 샤를과의 결혼 생활에서 진정한 소통이나 감정적 교감은 찾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그녀는 더욱 이상적인 관계에 몰입하고 갈망하게 되었다. 결국 가슴 뛰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만의에서 존재의 이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삶의 의미를 찾고 또 그렇게 만들어 줄 유일한 통로를 완벽한 사랑의 관계에서 찾았다. 그녀는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정해 주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끝없는 열정과 헌신은 있으면 더 좋고.
그녀에게서 보이는 자기애와 인정 욕구는 그녀가 추구하는 완벽한 관계의 또 다른 심리적 원인으로 이야기된다. 엠마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사랑받아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받는 존재로써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고자 했다. 이러한 그릇된(?) 자기 객관화는 그녀는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극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여성으로 추켜세웠다. 또 그러한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겼다.
이런 종류의 자기애는 평범한 연애나 관계에서는 만족스러운 감정적 교류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끊임없이 인정받아야 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엠마 또한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랑을 이용했다. 그녀에게 사랑을 상대방과의 관계보다는 자신이 '존귀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집착했다. 결국 그녀에게 완벽한 사랑이란 스스로를 감정적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관계였다.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존재.
그럼에도 그녀의 불행을 완성시킨 실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실의 분완전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더욱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랑을 갈구했다. 현실의 결혼과 관계 속에서 느끼는 권태와 고립을 잊기 위해 더 극적이고 감정적으로 풍부한 사랑을 꿈꿨다. 완벽한 사랑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믿었고, 그 믿음의 색깔이 짙어질수록 그녀는 현실과 멀어졌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는 무척이나 정당한 듯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면, 과연 그 관계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엠마가 바라는 완벽한 관계에서 그 이상함을 보았을지 모르겠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다면 사랑은 불행해지기 쉽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하는 순간, 그 정서적 공허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어떠한 이유로 포장을 한다 하더라도, 비이성적인 이상은 실제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허상이라는 사실이다. 그 종착점은 누구나 알고 있듯 새드엔딩일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닐까.
누구나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가 있다. 이제 막 시작하는 관계도, 이미 익숙해진 오래된 관계에서도 결혼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존재한다. 뭐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기대가 깨어지기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기대는 실망을 낳는 법이다.
엠마도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샤를 보바리와 결혼했다. 그녀도 가슴 뛰는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을 꿈꾸었다. 비록 그 환상이 그래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그녀의 시작은 다른 사랑들처럼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결혼 후 그녀의 삶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샤를은 다정하고 성실한 남편이었다. 과묵하고, 책임감 있고, 또 경제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은. 하지만 그녀가 바라던 극적이고 열정적로 사랑을 표현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생활인으로써의 남편 역할에 충실했다.
엠마는 샤를과의 일상에서 따뜻한 교감이나 관계에 대한 열정을 원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자신이 샤를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표현, 또 뜨거운 열정. 하지만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도 단조로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샤를과의 일상도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그녀는 시골 생활에 점차 지루함을 느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로움에 오히려 지쳐갔다.
소설은 엠마가 느끼는 결혼 생활에 대한 권태로움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결혼 생활을 기대했지만, 샤를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는 시골 의사로 환자를 돌보고, 안정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것이 그의 역할에 전부였다.
반면, 엠마는 감정적인 충만, 가슴 뛰는 일상, 가끔은 자신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모험을 꿈꾸었다. 시골 생활에서 그녀는 어느 것 하나 만족할 수 없었다. 불만의 활촉은 샤를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이 남편의 무능력함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자신이 만들어버린 환상의 세계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과연 그녀가 결혼 후 마주한 현실이 그토록 냉혹했을까? 삶을 파괴할 만큼 견디기 힘들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녀는 샤를과의 관계에서 사랑이나 감정적 충족감을 얻지 못했지만 작고 소박한 기쁨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정 안에서의 헌신과 남편을 보조하는 것에 불과했다.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엠마는 이러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적응하지 못했다. 남편을 보조하거나, 가정을 돌보거나,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더욱 감정적이고 강렬한 경험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를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가족의 부양이라는 의무에만 집중하는 샤를에게서 엠마는 높은 벽 같은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그저 반복적인 일상 속에 갇히게 된 엠마는 고립된 일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점점 더 자신의 이상향에 간절했던 것은 아닐까?
여성들이 빵과 장미를 요구했던 사건은 20세기 초에 일어났다. 그보다 이전인 19세기에는 여성의 이름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했을 정도였으니, 그 무엇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여성의 삶은 대부분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우리 앞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 모든 원망의 씨앗은 가까이에 있는 남편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혼 생활의 한계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맥락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여성에게 제한된 역할을 부여했고, 결혼은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는 중요한 제도로 남용되었다. 여성은 가정에서 남편을 돌보고 자녀를 양육하는 역할을 강요받았고, 사회적 활동이나 독립적인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엠마는 샤를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어머니, 혹은 할머니들은 그때는 다들 그랬다고 한다. 그러면서 함께 가까이에 있는 당신들의 남편의 험담을 한다. 강요받은 좌절과 권태와 희생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상적인 사랑은 우리 사회의 억압적 구조 속에서 여성들이 느꼈던 한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서만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라면 의존적인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상대방에게서 나의 행복을 찾고, 나의 불만을 상대방에게서 전가하고, 맞지 않는다 정의하고, 그리고 또 다른 완벽한 사랑을 찾는다.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한다고 모든 이들이 엠마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 물론 외도하는 경우가 바퀴벌레 숫자보다 많다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는 선택이 과반수 이상이라 믿는다. 엠마도 자신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 생활에서 느낀 권태와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이상적인 사랑을 찾기로 했지만 그녀의 삶을 결코 풍족하게 만들어 줄 수 없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로돌프와의 불륜이었다. 로돌프는 샤를과는 달리 자신감 있고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의 남성다움은 엠마의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엠마는 로돌프를 통해 그녀가 소설 속에서 꿈꾸어 왔던 낭만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엠마는 로돌프와의 관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를 통해 그녀가 항상 원했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결국 그녀는 로돌프와 함께 도망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꿈꾸던 완벽한 사랑을 이룰 기쁨에 가득 차서 말이다. 하지만 로돌프는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돌프가 그녀를 떠나자 엠마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지겨운 현실의 구렁텅이에서 빼내줄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엠마는 이후 레옹과 또 다른 불륜에 빠지게 된다. 레옹은 엠마에게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성격이다. 그녀는 그를 통해 다시 한번 이상적인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레옹과의 관계 역시 그녀가 바라는 완벽한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엠마의 이상향에 대한 욕망은 감정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소비 해서도 함께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이 꿈꾸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삶을 희망했다. 그녀는 자신이 꿈꾸는 일상을 만들기 위해 과도한 소비에 빠지게 된다. 옷, 장신구, 가구 등 화려한 사치품을 끊임없이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류층의 삶을 따라 하려 애쓰기 시작했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자신을 행복하게, 혹은 행복한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데려다줄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다. 상인 르뢰와의 거래를 통해 빚은 계속해서 늘어갔지만 사치스러운 소비는 줄어들지 못했다. 그녀는 돈으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적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가 활용되었고, 일시적으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욕망은 끝내 충족되지 못했다. 감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그녀의 환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상향을 향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버렸다. 샤를에 대한 불판, 로돌프와 레옹과의 불륜, 과도한 소비는 모두 그녀의 삶을 파멸로 몰고 갔다. 그녀는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현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깊은 절망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이 망가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두 연인에게는 이미 버림을 받았고, 걷잡을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후였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으로 자신을 파괴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로 그녀는 스스로 독을 마시는 선택을 한다.
이상적인 사랑과 환상을 좇는 선택이 무조건 어리석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실망하고, 원망하고, 포기하고, 싸우고, 화해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의 이야기는 오히려 지나친 노력의 그 결과가 비극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열정적이어야 하고, 뜨겁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나친 노력의 비극에 있다.
다른 하나를 뽑자면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누구에게도 쓴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요즘, 엠마의 불륜 스토리를 읽으면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환상에 빠져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무모함을 경계해야 한다.
크게 보면 소설은 단순히 한 여인의 비극적인 운명을 넘어, 인간이 가진 욕망과 그 욕망이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할 때 벌어지는 갈등을 이야기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더 나은 삶, 더 완벽한 사랑을 꿈꾸며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일 때, 또는 현실을 무시하고 환상에만 몰두할 때,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할 때, 그 결과는 종종 순수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야만적이고 비극으로 변모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발은 현실을 딛고, 머리는 이상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발이 현실에서 떨어지는 순간 감정적, 물질적 늪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라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맹목적인 열정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여러번 보았고 또 보고 있다.
다시 사랑으로 돌아와 조금은 낭만적인 꿈을 꾸었으면 한다. 그 기대와 현실 사이에서 균형만 잘 이루어진다면 관계를 가슴 뛰게 만드는 자극제가 될 거라고 믿는다.